드라마

착한 남자 - 기억을 찾은 서은기와 그리고 남은 한 조각...

까칠부 2012. 11. 2. 09:55

기억이 허무한 것은 그것이 결국 남의 이야기인 때문이다. 윤회란 반드시 죽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다르다. 필경 내일의 나도 다를 것이다. 서로 다른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데 그것이 나의 기억일 리 없지 않겠는가.

 

슬프다. 화가 난다.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음에도 다시 차를 돌려 그에게 달려갔던 것이 아니던가. 원망이란 바람이다. 바람이 있기에 원망도 한다. 아무런 바람도 없다면 그것을 증오라 부른다. 지금의 서은기(문채원 분)의 상태가 그렇다. 더구나 어느 정도 예감하고 대비도 하고 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온 기억이었다. 갑작스런 너무나 솔직한 강마루(송중기 분)의 고백에 놀라고 당황한 것은 그때나 같지만 그럼에도 그를 사랑한 기억조차 단지 기억으로 떠올리고 만다. 강마루의 말처럼 그녀는 지금을 살아가는 타입인 때문이다.

 

그래서 한 순간에 마치 오랜 시간이 흐른듯 그녀는 메말라버리고 말았다. 마치 시계를 빨리 돌린 것마냥 그녀의 감정은 그렇게 퇴색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부탁을 받고 강마루가 일부러 준비한 선물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그래서 바래고 바래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탁한 잿빛을 띄고 있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랑만큼이나 강한 증오 뿐. 아무런 바람조차 남지 않은 메마른 미움 뿐이다. 그녀는 과연 그보다 더 오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자신은 얼마나 강마루를 사랑했고 강마루 또한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가를.

 

참으로 공교로울 것이다. 작가의 악취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필 강마루가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즐기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한시적이다. 언젠가는 끝나고 말 행복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을 열고 행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친구가 있고, 그들의 북적임이 있고, 그들의 따뜻함이 있고, 아주 잠깐이겠지만 그 잠깐이나마 지금의 행복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순간 그 짧은 행복의 전부였던 서은기가 최악의 형태로 기억을 되찾고 만다. 사랑은 식고 사랑의 감정마저 메마른다. 기억마저 퇴색된다. 긴 꿈에서 깨어난 듯 그녀의 주위만이 급격히 시간이 흘러 바래간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한다.

 

만일 이것이 <착한 남자>라는 제목의 이유라 한다면 필자는 무척 화가 날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탄하게 될 것이다. 한재희(박시연 분)를 끝내 견뎌냈듯 그럼에도 강마루는 견뎌낼 것이다. 서은기의 메마른 증오를, 빛바랜 보복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며. 그마저도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처음부터 각오하던 바였다.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다시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강마루의 병은 시한폭탄인 동시에 어떤 반전을 위한 기폭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깔아놓은 것이 많다. 한재희는 시험에 든다. 과연 그녀는 진정 태산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강마루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안민영(김태훈 분) 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사랑하는 것이 아닌 소유하는 방식이다. 같은 죄에 묶는다. 돌아오지 못할 너무 먼 길을 떠나왔다. 옷을 빼앗긴 선녀처럼 한재희는 안민영에게 이끌려 그와 함께 너무나 먼 길을 떠나오고 말았다. 돌아가기에는 걸린 것이 너무 많다. 두 번의 로드킬이라는 말이 그래서 무척 상징적으로 들린다.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옷을 돌려주지 말라 했지만 아직 둘일 때 옷을 돌려주어 선녀는 아이들을 양팔에 나누어 안고 그대로 하늘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죄를 강조한다. 어차피 너는 그런 여자다. 그런 사람이다. 그렇게밖에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가 있다. 그래서 자기가 그녀의 곁에 있다. 그녀와 함께 여기까지 왔다.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최면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고. 이제 그녀의 곁에는 자신밖에 없다. 그녀의 곁에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 돌아가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는다. 다시 돌아가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경멸의 말을 던진다. 조롱하며 상처주고 그녀를 끌어내린다. 한재희의 지옥이다. 한재식(양익준 분)과는 다른 그녀의 족쇄다.

 

강마루와 서은기는 어쩌면 조만간 결혼하게 될 것이다. 서은기를 사랑하는 강마루와 강마루를 증오하는 서은기가. 서로를 상처주고 스스로에게 상처입힌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있을까? 잊혀진 기억 - 미처 찾지 못한 당시의 진심이 그들에게 구원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다. 시린 비극이며 아픈 희극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슬픔이 없다면 아름답지 않고 아픔이 없다면 향기롭지 못하다. 그들의 결혼이 마지막에는 서로를 이어주는 마지막 구원의 줄이 되어주기를.

 

비극이 예고된다. 강마루를 여전히 못잊어하는 한재희로 인해 더욱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안민영과 오로지 서은기만을 바라보는 사람 좋은 박준하(이상엽 분)와 무엇보다 사랑했던 기억만을 잃어버린 서은기로 인해. 강마루의 마지막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반전을 기대하게 된다.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를.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문채원의 반전연기가 차라리 소름이 끼칠 정도다. 마지막 10여 분 서은기의 표정은 강마루와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는다. 강마루를 사랑하는 자신마저 내려놓은 채 창백하도록 시린 감정의 날을 벼린다. 강마루와 키스하며 무심하게 치켜뜬 눈매에서 그녀의 지치고 마모된 감정의 흔적을 느낀다. 멋진 배우들이 멋진 드라마를 만든다.

 

착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쫓고 있던 궁금증이었다. 어째서 강마루는 착한 남자인가? 역설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그도 아니면 위로인가? 드라마가 더욱 깊어진다. 인물들의 감정 또한 깊어진다.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다. 좋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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