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드라마의 제왕 - 마치 장난처럼, 기회와 교차하여 찾아온 절망이 짓궂다

까칠부 2012. 12. 26. 08:25

어려서 새옹지마의 고사를 듣고 그렇게 투덜댄 적이 있었다.

 

"사는 게 장난이냐?"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고... 아니다.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일도 있다.

 

더 정확히 나쁜 일이 있으려고 좋은 일이 있으며, 좋은 일이 있으려고 나쁜 일도 있다. 나쁜 일이 있다고 마냥 탓하고 절망하지 않는 건 좋은데 좋은 일이 있어도 역시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만일 이것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그러는 것이라면 상당히 악취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게 말 그대로 장난인가?

난데없이 대기업으로부터 영입제의가 들어온다. 제국보다도 어쩌면 더 거대한 대자본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진출하는 첨병으로써 자신들이 세울 회사의 대표로써 앤서니를 영입하고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을 제시해 온다. 그동안 제국의 방해로 인해 번번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곤 했던 앤서니에게 드디어 운이 돌아오려는 모양이었다. 하필 당대의 스타로써 대기업과 가장 먼저 계약하기로 약속이 된 성민아(오지은 분)의 주선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앤서니의 이고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말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밑에서 아닌 자기가 만든 회사를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키워내고 싶다고 하는 원대한 꿈마저 한순간에 접어버리도록 만들 정도로 대기업의 제안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기업과 계약을 하기로 한 그 날 공교롭게도 이고은이 병으로 쓰러지고 만다. 시험에 든 것이다.

 

"고작 사랑 때문에 자신의 꿈과 야망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고은인가? 아니면 대기업과의 계약인가? 이고은에 대한 사랑인가? 아니면 대기업과의 계약을 통해 장차 이루어낼 자신의 오랜 꿈과 야망인가? 그리고 앤서니는 너무나도 확고한 신념과도 같던 자신의 말과는 달리 그같은 갈림길에서 조금의 주저도 없이 이고은을 선택하고 만다.

 

성민아가 묻는다. 당신에게 이고은이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가?

 

"나도 이제야 알게 됐어. 이고은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즉 앤서니의 이고은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대기업과의 계약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병으로 쓰러진 이고은을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약속시간에 늦은 것을 성민아가 작가가 위독해서 그런 것으로 둘러댐으로써 앤서니와 대기업과의 계약이 다시 성사되는 듯 싶자 이번에는 다시 앤서니에게 병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하는 바로 그 원인이 된 유전병이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이쯤 되면 악의라고까지 할 만하다. 사람이 장난감인가?

 

갑자기 다시 없을 기회가 찾아오고, 그러나 쓰러져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로 인해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고, 덕분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는다. 다시 성민아의 도움으로 기회를 얻게 되고 나니 이번에는 병이 찾아온다. 그냥 병이 아니다.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 아니 자신이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치명적인 병이 절망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다. 차라리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를 위해서 그동안 위기가 없었던 것일 게다. 제국도 잠잠하고, 드라마의 시청률도 탄탄대로다. 경쟁작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치열하게 시청률 경쟁을 벌이며 제작자인 앤서니를 안달나게 하는 작품이나 제작자가 없었다. 시청률이 계속 상승일로를 그리는 가운데 강현민(최시원 분)과 성민아 사이의 사소한 투닥거림이 기껏 갈등요소로 쓰일 뿐이다. 그나마 비로소 강현민이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제목에 걸맞는 현실적 요소로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강현민은 과연 배우로서 거듭날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순탄하다 보니, 더구나 그 끝에 감히 기대조차 하지 않던 더없이 큰 기회가 찾아오고 나니, 그래서 앤서니의 병은 더욱 치명적이고 더욱 한없이 절망적이다. 이고은에 대한 자신의 감정마저 확인하게 되었다. 그에 솔직해지고자 했다. 이고은에게 자신의 감정을 어색하기만 한 선물과 함께 전하고자 했다. 하필 그날이었다. 그날 앤서니는 절망의 끝에 서게 된다. 어쩌면 이고은에 대한 자신의 감정마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의도하 읽힌다는 점에서 앤서니를 대신해 시청자로서 화가 나려 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속 인물들에 대해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 의도적으로 괴롭혀도 좋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이제껏 감정을 이입하며 보던 작품속 인물이 정작 작가의 도구이며 장난감에 불과했다.

 

드라마에 정작 드라마가 없는 것은 그래서다. 드라마에서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것은 드라마속 인물들 자신들이어야 할 터다. 그러나 그 위에 모든 것을 주재하는 작가가 있다. 작가의 의도와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실제로 이루어진다. 드라마속 인물들이 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특히 앤서니와 이고은에 대해서. 강현민과 성민아의 관계가 흥미를 자아내는 이유다. 아무래도 중심에서 살짝 비껴난 탓인지 강현민에게서는 어떤 의도를 읽을 수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최시원이 곧 강현민인 듯 실감마저 느껴진다.

 

최시원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아이돌 출신 배우로서 커리어에 비해 연기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드라마를 통해 최시원은 아이돌을 겸하는 배우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능청스럽게 강현민 자신이 되어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앤서니마저 착해진 지금 얄미움과 귀여움의 경계를 넘나들며 캐릭터가 가진 개성과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보는 즐거움이 있다. 재미가 있다.

 

이제 2회 남았다. 벌써 다음 드라마의 예고가 시작되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처럼 뜬금없이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남은 것은 신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불치병으로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앤서니와 그런 앤서니를 지켜봐야 하는 주위사람들. 눈물이 강을 이룰까? 회한과 용서와 화해가 바다를 이룰까? 어쩌면 이 드라마야 말로 주인공 김명민에 대한 디스인지도 모르겠다. 강현민이 말한다. 드라마는 멜로라고.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CF가 많이 들어오려면 멜로여야 한다고. 하물며 신파다. 김명민이 그럴 배우가 아니라는 것은 필자가 더 잘 알지만 그만큼 드라마가 이해하기 쉽지가 않다.

 

그래도 해피엔드일 것인가? 아니면 역시나 배드엔드일 것인가? 배드엔드라면 역시 화가 날 것이다. 아무리 허구의 캐릭터라고 작품속에 살아있어야 할 인물을 이렇게까지 희롱하고 마는가. 그나마 해피엔드라면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입하며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다.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함께 울고 웃고 화내고 원망할 수 있다.

 

여전히 드라마속 드라마 '경성의 아침'은 실체가 없다.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액자드라마를 기대했다. 하긴 덕분에 작가로서의 이고은이 약해졌다. 작품을 쓰기보다 사랑을 한다. 실제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도 거의 소홀하게 스쳐 지나간다. 잘못된 기대였을 것이다.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