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창력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일상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가창력을 기준으로 가수의 자격을 따지고, 노래를 듣고 감상하기보다 먼저 그것을 평가하고 단정하려드는 것도 최근에서야 나타난 경향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 예전에는 말도 안되는 가수들이 적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결국 평가라는 것은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계량화의 시도라는 것이다.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단정하고 결론을 내린다. 자기 노래라면, 혹은 자기 가수라면 그것이 쉽지 않다. 자기가 진정 좋아하고 혹은 공감하는 자기의 노래이고 가수라면 그것으로 이미 만족해 버리는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아이돌 노래 가운데 정작 그 팬과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쓰여진 노래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수를 보고, 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나의 노래가 아니다.
아마 앞서 아이돌에 대해 쓰면서 말한 연장선상일 것이다. 아이돌은 내가 아니다. 나와 같은 입장에 있지 않다. 나와 대등하게 나와 눈을 마주하고 서 있지도 않다. 그들은 TV라고 하는 상자로 포장된 인형과도 같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그 자체를 즐긴다. 타자화는 곧 객관화로 이어진다. 외모가 어떻고, 몸매가 어떻고, 의상이 어떻고, 춤이 어떻고, 노래실력이 어떻고.
물론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자기 노래라는 것이 있다. 노래방에 가서 저도 모르게 선곡하는 노래들이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대중적 히트곡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노래들이다. 그런데 그런 노래들은 노래에 대해서도 더구나 가수에 대해서도 그다지 판단하게 되지 않는다. 당연하게 듣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가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사에 공감한다. 가사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듯하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쩐지 마음이 가고 공감이 간다. 노래에 빠져들어 그 노랫속의 주인공이 된다. 혹은 노래가 가리키는 대상이 되곤 한다. 히트곡의 공식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졌다. 자기 자신마저 객관화 계량화한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일 게다. 그보다는 그만큼 삶이 각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쫓기듯 내몰리며 사는 삶이 자신을 돌아볼 여유마저 빼앗아버린다. 유독 인터넷에서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정의감이라기보다는 자신을 잊으려는 발버둥이다.
노래가 좋으면 듣는다. 노래가 좋다는 건 무슨 뜻일까? 노래를 잘 불러서? 혹은 어떤 기술적인 장점이 있어서? 장르가 무엇이기에? 세계적인 트랜드가 어때서? 혹은 남들이 좋아해서? 많이 듣고 들리니까? 한 번 들어도 내 노래가 있고, 아무리 들어도 남의 노래가 있다. 아마도일 테지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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