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나이를 먹으면 다시 공동체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배우고 익혔다. 아버지여야 했으며 어머니여야 했다. 궁극적으로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부모였고, 어른이었으며, 그런 부모와 어른들을 보며 아이들 역시 어른이 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며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공동체의 어른들로, 그리고 공동체의 어른은 보다 넓어진 세계의 또다른 누군가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바로 영웅이었다. 영웅이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신격화된 개인을 뜻한다. 미디어의 발달은 실시간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특정인을 그런 영웅으로 받들도록 만들었다.
이를테면 괴테의 소설 '베르테르의 슬픔'에 감명받은 나머지 노란 조끼를 입고 심지어 주인공을 쫓아 스스로 목숨을 끊던 당시의 젊은이들이 그런 예의 하나일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도, 집안이나 마을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로부터도, 태어나기 전부터 당연하게 추앙받던 어떤 대단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그로부터 찾기 시작한 것이다. 더 지혜롭고 더 절실한 자신들의 이야기가 그들로부터 들려졌다.
작가의 시대라 할 것이다. 거의 무한정 복제가 가능한 활자라는 수단을 통해 개인 또한 무한히 복제되어 또다른 개인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말과 행동, 그들의 방식이 그같은 다른 수많은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정한 한 개인의 저작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결정되어지던 시대였다. 그리고 곧이어 라디오와 TV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책보다 더 빨리 동시에 소리와 영상을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들 새로운 매체들은 또다른 새로운 영웅과 우상을 필요로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이 청년운동이 한창 크게 일어나던 1960년대를 기점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노출된 문명사회의 모순과 한계는 곧 젊은 세대들에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 도저히 이대로 기존의 어른들과 같은 어른이 될 수는 없다. 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는 전혀 다른 어른이 - 아니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했었다. 그리고 그러자면 새로운 모델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부모와는 다른, 공동체의 어른들로서는 도저히 그들에게 줄 수 없는, 어떤 위대한 영웅이나 대단한 작가들도 들려주지 못하는 답을 들려줄. 그들 자신의 눈높이에서. 1960년대와 70년대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록이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사실은 그 또한 당시의 젊은이들이 그토록 혐오해마지않던 기성세대의 자본이 의도한 결과이기도 했다. 비틀스가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이나, 롤링스톤즈가 수천만장의 앨범을 세계에 팔아치울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 수만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공연을 열 수 있었던 모두가 자본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이들이 그것을 좋아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앞세웠다. 더 많음 음반과 공연티켓을 팔기 위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그들은 적극적으로 스타들을 포장해서 새롭게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는 라디오와 TV의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에 선보이게 되었다. 곧 미디어에 의해 정형화되고 양식화된 하나의 스타일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스며들게 되었다. 흔히 포크라 하고 록이라 하면 당연하게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록스타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영웅이고 우상이었다. 그들이 바로 동시대의 젊은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새로운 젊은 세대는 기존의 권위에 기대지 않는다. 기존의 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이 있다. 그들 또래만의 그들의 문화가 있고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확산시킨 것이 바로 미디어였다. 라디오와 TV, 지금은 인터넷이 그 역할을 상당부분 대신한다. 새로운 미디어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에게 모델이 되어줄 그들 또래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 동시대의 젊은 아티스트들,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이란 다른 말로 카리스마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의 권위에 기대지 않는 그들 또래만의 공감일 것이다. 때로 젊은 - 그보다는 어린 세대들에 의한 스타에 대한 광적인 추종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마크 채프먼이 존 레논을 쏘게 된 이유였다. 그는 존 레논을 광적으로 추종한 나머지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것이 이상화된 대상으로서의 존 레논과 현실의 존 레논에 대한 괴리와 그를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같은 화장을 하고, 같은 말투와 몸짓을 하고,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을 대신한 다른 자신들만의 우상을 찾아 그들을 닮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이내 자본에 의해 받아들여져 상업적으로 기획되고 양산된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을 찾아서 이상화된 캐릭터로써 가공된 대상을 그들에게 제공한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이 인간의 대상화에 익숙한 일본이었고, 일본식 아이돌은 특히 아시아권에 있어 그 표준이 되다시피한다. 어쩌면 기성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익숙한 유교적 전통이 만들어낸 독특한 현상일 것이다. 기성세대가 만들고 젊은 세대가 소비하며 그에 자신을 맞춰간다. 하지만 어디서나 아이돌이라고 하는 근본의 목적이나 특징은 같을 것이다. 소비의 주체로 대두된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만의 문화와 스타일을 제공한다. 아이돌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이나 춤과 같은 기능적인 부분이 아닌 그들 자신이 보여주는 스타일 그 자체다. 캐릭터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일 것이다. 과거 아이돌이란 특정한 10대의 청소년들이나 좋아하던 그들만의 문화였다. 아이돌 자신도 10대의 그들을 향유하는 계층과 비슷한 또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의 대중문화에 있어 아이돌이란 더 이상 10대만을 일컫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어느새 데뷔하고 시간이 지나 10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20대, 심지어 30대에 데뷔하는 아이돌마저 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들을 향유하는 계층 역시 나이 지긋한 한 가정의 가장이나 가정주부들까지 넓게 확산되고 있다. 어째서일까?
결국은 역시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것이다. 대상을 찾고자 한다. 기존의 권위 - 혹은 현실로부터 찾지 못한 어떤 이미지화된 대상을 아이돌로부터 구하려 한다. 불과 수 년 전까지도 대중에게 있어 음악을 소비한다는 것은 음악을 내면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가수와 동일시하여 그 노래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기고 만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돌 음악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그 팬의 다수와 어울리지 않는 가사와 멜로디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현실의 각박함이 어쩌면 자기 자신과 실제의 현실을 돌아보기보다 가공된 이상화된 대상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만든 것은 아닌가. 연인으로서. 혹은 동생으로서. 때로는 딸처럼. 현실에 없는 무언가를 그들에게 기대려 한다. 다양한 아이돌이 나타나고 존속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아이돌 문화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현재 아이돌로 분류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정작 기존의 아이돌의 정의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많지 않다. 멤버들의 나이도 많고, 그 팬들 역시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연령대를 보여준다. 그들이 취하는 포지션도 다양하다. 보다 성인취향의 섹시함을 내세우거나, 아니면 힙합이나 록과 같은 마니아적인 장르를 앞세운다. 그만큼 아이돌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다양해졌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나 대상 역시 다양해졌다. 사실상 말이 아이돌이지 단지 지금시대에 맞는 아티스트라는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오랜 연습생기간을 거치며 혹독하게 훈련된 잘 다듬어진 가공된 대상으로서의. 가창력과 같이 특정한 기준으로 가수를 규격화하려는 의도와 그에 어울리는 가공된 상품으로서의 아이돌은 취지에서부터 맞아떨어진다.
전통적인 아이돌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아이돌이라는 자체가 그렇게 변화되어 왔었다. 근세에는 작가들이 아이돌이었다. 작가의 작품이나 캐릭터들이 아이돌이 되어 개인의 삶을 지배하고는 했었다. 아이돌의 반대편에 있는 듯한 록스타들 역시 그 시대에 있어 아이돌들이었다. 'HOT'와 '젝스키스'는 원조아이돌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비스트'나 '시스타'는 또 그들과는 다른 아이돌이다. 시대가 그들을 원한다. 대중이 그들을 원한다.
언제까지 아이돌의 시대가 이어질까? 그보다는 언제까지 대중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정형화된 가공된 대상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려 할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한 요구는 항상 있어왔다. 다만 아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이 생소한 만큼 충격량 또한 컸던 탓일 것이다. 구속된다. 당분간 아이돌의 전성시대는 이어지리라 보는 이유일 것이다. 단지 그 형태만 달리할 뿐.
필요에 의한 것이다.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할 필요 없이 그것은 자연스런 흐름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아이돌이다. 마음놓고 바라보고 또 바랄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그것이 아이돌 전성시대의 이유다. 역시나 단지 그 형태만 달라질 뿐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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