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동안 말해왔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았다.
과연 낸시랭의 가정사에 대해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알아왔던 이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더구나 지금 낸시랭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새삼 그 이야기가 이슈가 되니 그로 인해 상처입고 피해입은 사람들이 속출한다.
그로 인해 낸시랭은 이익을 얻었고 시청자는 피해를 보았다.
항상 반복되는 이야기들이다. 얼마나 대중이 이미지에 좌우되고 있는가.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고 만다. 자신은 이미지에 휩쓸리고 있었노라고.
낸시랭이라는 인간의 실체보다 보여지는 이미지로 그녀를 판단하고 결론지었노라고.
그래서 내가 더 냉정할 수 있는지도.
옹호하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한 번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을 수 있으니까. 각자 자기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으니 패륜이다. 세상 참 쉽게 산다.
남에게 상처줄 수 있는 말은 그래서 최대한 아끼는 것이 좋다.
비난을 하려면 모든 사실이 확정되고 나서 그때 가서 한 번에 일도양단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못하는 것이니 뭐라 할 수는 없을 게다.
나중에 사실이 어떻게 밝혀지면 어쩌려고.
비난에 동참하지 않으니 옹호로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 하는 것일 게다.
과연 어떤 사연들이 감춰져 있을까. 어떤 나름의 사정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경우가 살면서 너무 많다.
아무튼 결론은 가족의 이야기는 가족에게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문제가 있는데 아버지쪽 친척의 이야기를 듣는다.
조카는 형제의 자식이다. 형제 다음에 조카가 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확인되었다. 유방암으로 투병중이던 어머니의 치료비를 낸시랭이 대었다.
그 과정에서 소소한 다툼이나 갈등이야 암에 걸린 가족으로 인해 경제적 부담을 져야 하는 가족의 여러 경우들로 이해가 가능하다. 오랜병에 효자도 열녀도 부모도 없다.
그 병구완을 다 했다는 것만으로도 낸시랭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훌륭히 병든 어머니의 곁을 지켜냈다. 코스프레라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곁을 지킨 것은 무시되고 아버지를 부정한 것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
법에도 정상참작이라는 것이 있었을 텐데. 하긴 대중이 법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늘 있어온 헤프닝이다. 그냥 놀이라 보면 된다. 물어뜯을 거리가 생겼다.
타인을 물어뜯고 파헤침으로써 자신의 정의를 확인한다. 자신이 정의로움을 확신한다.
일단은 지켜본다. 욕이야 나중 가서 해도 좋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대신 욕해줄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다. 아직 나로서는 모르겠다. 원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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