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필자 역시 자신도 모르는 상처가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물론 어떤 상처는 어떤 연유로 생겨났는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기억이 생생할 뿐 그 상처들로 인해 새삼 아프거나 한가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상처를 입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더라도 상처를 입었다는 기억 말고 상처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져 있다.
그러나 역시 벌써 오래전에 잊고 지나쳤던 말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는 자체가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이미 지난 이야기들에 불과한데도 상대가 원망스럽고 때로 증오하는 감정마저 가지게 된다. 속이 욱신거리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여 자괴감마저 느끼는 경우도 있다. 말로 입은 상처는 영혼에 직접 새겨지는 때문이다.
태초의 세상은 신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국화라 이름하니 국화라는 꽃이 존재하게 된다. 패랭이꽃이라 할 때 패랭이꽃은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숲을 날아다니는 수많은 새들 가운데 유독 하나를 지목하여 종달새라 이름했을 때 종달새는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울산바위라 이름짓기 전에는 그것은 단지 수많은 돌덩이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름붙여지지 않은 수많은 산들은 그냥 산일 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겠지만 그저 산으로써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뿐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사유하고 인식하는 과정 또한 언어의 힘을 빈다. 자신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그 정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말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과 자기에게 붙여진 별명들과 자신을 향한 수많은 평가들. 그를 통해 자기의 안에서 자기라는 존재는 재구성된다. 그런데 그 말이 오염된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왜곡되고 더럽혀진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뒤틀린 말을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 더구나 기억이라는 자체가 언어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말들은 오히려 더 강한 의미로써 떠올려지고 생각되어진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과연 사유라는 것을 할까? 곤충들은 과연 언어로써 자신의 경험들을 기록하고 기억할까? 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의 섭리는 그들의 몸에 난 상처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아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기고 있던 기억조차 떠오르는 순간 그때의 모든 감정들마저 함께 떠오르고 만다. 그 당시의 분노와 굴욕감과 원망과 아픔이 말이라는 형태로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만다. 사실상 치유란 없다. 잊혀지고 극복될 뿐이다.
아마 몸에 난 상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아니기에 무심하게 지나간다. 별 것 아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도 안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 자신들을 향해 가혹하게 - 아니 아주 약한 강도의 비난이라도 가하려 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어째서 그리 비난하는가? 어째서 자신들을 공격하여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가? 단지 이기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은 보이지 않더라도 직접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는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다.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은 더욱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차라리 주먹을 휘둘러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칼을 휘둘러 베인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희미해진다. 하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아니다. 잊혀지지 않은 시상 상처는 계속 남는다. 상처가 남은 이상 기억에 의해 고통 또한 심지어 더 커지기까지 한다. 어떤 신약도, 어떤 최첨단의료장비도, 어떤 명의도 그것을 쉽게 낫우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무심하게 말한다. 잘못했노라고. 잊으라고. 없었던 일로 넘어가자고.
이미 여러차례 경험했다. 말이 때로 사람을 죽일수도 있다는 것을. 죽은 사람에게 미안하다 사과하겠는가? 죽은 사람에게 미안하니 용서해달라 말하겠는가? 없었던 일로 기억에서 지워달라 말하겠는가? 하기는 그래서 더 쉽게 잊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은 기억할 수 없기에. 책임을 물을 일도, 원망을 전할 일도, 그로 인해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새삼 상기시킬 일도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침묵하며 없었던 일처럼 넘어가기도 한다. 실감이 없다. 자신의 말이 갖는 힘은 알겠는데 그 결과에 대한 어떤 인식도 사유도 없다.
아이들과 같다. 항상 하는 말이다. 칼을 손에 쥔 아이들과도 같다. 칼이 갖는 예리함에만 취해서 그 예리함이 낳을 결과에 대해 전혀 생각하려 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다. 자기가 베이면 그때나 앗뜨거라 엄살을 피울 뿐이다. 그것도 칼이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말한다. 쉽게 칼을 휘두른다. 자기가 아프기 전까지. 자기의 상처에는 그래서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을 보호해달라. 자신을 지켜달라. 자신을 존중해달라. 그제서야 허구의 세상은 실체가 되어 인지되고 인식된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이다.
이미 말을 내뱉고 난 다음에는 늦다. 이미 말이 입밖으로 나와 상대의 귀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상대가 말로 인해 상처입고 그것을 기억에 새기게 된다면 설사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더라도 그 상처는 영원히 계속 남게 된다. 어려서 들은 못난이라는 말 한 마디로 인해 평생을 누구에게도 안주하지 못하고 뭇이성들 사이를 헤매야 했던 어느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평생의 컴플렉스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가버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도 없다. 아무리 미안하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도 이미 영혼에까지 상처가 깊이 새겨진 뒤다.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것이면 경찰은 필요없다. 법도, 윤리도, 판사도, 변호사도, 어떤 세상의 규범이나 질서도 무의미하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미안하다 말하면 된다. 돈을 훔치고 나서도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면 해결된다. 사람을 속여 절망에 빠뜨리고 나서도 미안하다 한 마디 사과만 하면 그것으로 해결된다. 사람을 죽도록 몰아세우고서도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 사과로 끝낼 것이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무에 있을까?
낸시랭과 관련해서 필자가 자신의 생각조차 굳이 아끼려 한 이유였다. 판단을 미뤄두었다. 아예 판단을 않으려 했었다. 과거 타블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었다. 많은 이슈들에서 그래서 필자는 남들보다 한 발, 아니 여러 발 느리다. 사실이 모두 밝혀진 뒤에 비판을 해도 늦지는 않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확정된 뒤에 탓을 하고 책임을 물어도 그리 늦은 것은 아니다. 자칫 섣부른 예단과 오해로 인한 성급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때는 벌써 늦은 것이다.
어떤 말로도 어떤 사죄로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책임을 물을 때는 냉정하고 엄격하게 하더라도 그것이 자칫 억울함을 남기지 않을까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도덕이고 이성이고 양심인 것이다. 굳이 특정한 경우에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신중하려 하려는 그것이 필자의 정의이며 자존심이기도 한 것이다. 그로 인해 누구에게도 상처입히지 않겠다. 조금 덜 정의롭고 조금 덜 도덕적이고 그로 인한 책임을 나중에 지게 되더라도 당장 자신으로 인해 상처입는 누군가를 만들지는 않겠다. 말이란 칼이기에 더욱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때늦은 말을 남기기도 한다. 과연 누가 듣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너무 섣부르다. 너무 성급하다. 아직 밝혀진 것은 그다지 없었다. 정황만 있을 뿐 사실이 어떠한가는 아직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가족 사이의 일이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일을 외부에서 판단하기란 무척 힘들다. 하지만 너무 정의롭다. 너무 착하고 도덕적이다. 아주 작은 더러움도 흠집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먼지를 털어내려 칼을 휘두르고 얼룩을 지우려 불을 지른다. 설사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소매치기에게 사형을 구형할 수도 없고, 한낱 좀도둑인데 종신형에 처할 수도 없다.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반성은 없다. 다시 반복될 것이다. 말했듯 타인의 상처는 보이지 않으니까. 말로 인한 상처는 더구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느끼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리 성급하게 무모한 판단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에 대한 비판에는 민감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는 누구보다 과감하다. 그것을 정의라 확신한다. 그에 회의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마저 공격성을 드러난다. 자신은 잘못이 옳다. 자기는 누구보다 옳다. 허구의 세상이 만든 허구의 정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된다.
고작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사람을 죽인다. 상처를 남기고 흉지게 하고 영원히 그로 인해 고통받게 만든다. 말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은 항상 새롭다. 자신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타인도 그럴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저열함이 차라리 절망스러울 정도다. 비난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과하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사과조차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기는 할까. 차라리 여전히 확신에 차서 의심하고 말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솔직하기라도 할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고 영원히 또 반복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는 이유다. 쉽게 잊고 반성을 모르고 다시 쉽게 반복한다. 아마도 영원히.
아직도 모른다. 필자로서는 아직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그래서 때로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무엇으로 저리 확신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저리 단정짓고 무모하게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 것일까? 언론마저 부추긴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마저 침묵하고 있다. 신중하자는 말조차 물타기로 여겨진다. 반복되어왔고 반복될 것이다. 화조차 나지 않는다.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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