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이시영과 아이돌, 대중의 정의와 배설에 대해...

까칠부 2013. 4. 27. 09:20

1923년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자 누군가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집이 불타고 무너진 것과 우물에 독을 탄 것과는 전혀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지진으로 인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을 직접 바로 곁에서 보고 듣고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그와 같은 선동에 넘어가 조선인을 학살하고 테러하는데 가담하고 있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졸지에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던 강대국에서 패전국으로 전락한 독일의 국민들은 그같은 현실을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았다. 그 원인을 찾았다.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아나섰다. 유럽을 호령하던 대독일제국이 - 더구나 전황이 뚜렷하게 열세를 보인 것도 아니고, 연합국은 여전히 독일의 영토에 발을 딛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합국에 항복하고 만 이유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으려 한 것이었다. 내부에 적이 있었다. 내부에 독일을 패전국으로 만든 원인이 있었다. 패전의 결과 독일에게 지워진 가혹한 책임은 독일인들의 일상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았기에 자신이 앞에 놓인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독일인들의 노력은 처절함 그 이상이었다. 누구인가? 무엇때문인가? 무엇이 독일을 - 아니 자신을 이런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한 것인가?

 

마을에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 어쩌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급사를 했다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로 사고를 당해 다치게 되었다거나, 이유를 찾는다. 예전에는 숲에 사는 요정에게 그 책임을 물었을 것이었다. 짓궂고 장난기 많은, 때로는 변덕스럽고 사악하기까지 한 초자연적 존재가 자신을 골탕먹이려 이런 일들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미지의 영역이던 숲마저 인간의 일상으로 편입되면서 인간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불길한 존재가 있어서 마을을, 자신을 이런 곤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일 게다. 필경 그는 아주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귀한 신분이어서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도 안되었다. 딱 자신들이 응징하여 퇴치할만한 대상이면 충분했다. 혼자사는 여성이라든가, 혼자가 된 여성이라든가, 그 가운데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신분과 재산과 지위와 재능을 가진 여성이라든가. 마녀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만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 역시 어느 순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괴물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불과 수십년 전 바로 이웃한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출신의 장교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이 전국적인 뜨거운 관심과 논란 속에 치러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회가 불안할 때, 그래서 국민들이 동요할 때, 유럽의 군주들은 당연하다는 듯 유대인들을 격리하여 거주케했던 게토의 문을 열어 그들을 성난 군중의 제물로 삼고는 했었다. 이 모든 문제는 바로 저들 사악하고 더러운 이교도들 때문이다. 유대인의 세계정복음모를 다룬 시온의정서라든가, 유대인들을 자기들 땅으로 돌려보내려던 열강들의 움직임은 그런 연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대인은 다름아닌 유럽의 일반시민을 위해서라도 격리되어야 했고 차별받아야 했다.

 

전근대의 조선에서도 엄격한 신분제를 지탱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천민의 존재였다. 지배신분에 의해 억압받고 찾취당하던 가엾은 신분이 다름아닌 일반 상민들이었을 테지만, 그러나 그들은 또한 천민인 백정을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 그들의 딸을 강제로 데려다 욕을 보이고, 그것을 빌미로 그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자시의 향락을 즐겼다. 차라리 양반과 같아지지는 못할 망정 천민과 같아질 수는 없다. 일본에서도 그래서 메이지유신 이후 제도적으로 사라진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어 사회적문제가 되고 있다. 저들과 같아질 수는 없다. 그것은 우울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주문이기도 할 터였다.

 

야밤에 고양이가 운다.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재수없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고양이의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단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계기가 되어 자신을 혼란케 만드는 것일까? 하지만 주인도 없는 길고양이에게 책임을 돌리고 반항할 힘조차 없는 작은 짐승에게 돌을 던지고 나면 모든 것은 해결되고 마는 것이다. 고양이가 잘못한 것이고 그를 응징함으로써 원인을 제거했다. 때리고, 밟고, 불을 지르고, 꼬리를 자르고, 끝내 잔인하게 죽이고, 그럼으로써 쾌감을 얻는다. 고양이가 아니라도 좋다. 개여도 좋고 사람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에게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공격은 매우 정의롭고 자신의 양심을 충족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악한 짐승이니 죽여도 좋다. 피해를 주니 죽여 없애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인터넷을 하다 보면 때로 몸서리쳐지도록 증오가 넘쳐자는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아니 때로가 아니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다. 기억이 닿는 저 멀리에는 최진실이 있다. 불과 작년 타블로와 관련한 재판이 마지막 결론을 내놓고 있었다. 얼마전에는 설경구가 그 대상이었다. 설경구는 어떻게 이혼하고 지금의 아내와 재혼하게 되었는가? 낸시랭을 아버지를 부정한 패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이번에는 이시영의 권투시합의 결과에 대해 편파판정이었는가의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이돌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아이돌 때문이다. 싸이의 성공과 조용필의 귀환에 힘입어 지금껏 한국의 대중음악에 존재해 온 많은 문제와 모순들이 마치 아이돌로 인한 것처럼 몰아세운다. 가창력논란에, 선정성시비에, 연기에 도전하는 아이돌에 대한 엄격함을 넘어선 가혹하기까지 한 비판에. 한국의 왜곡된 대중문화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들은 정의감에 넘친다. 자신들이 정의를 실천하려 한다.

 

현실에는 많은 개인을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들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바로 돈일 것이다. 항상 피곤하도록 일하는데 정작 쓰려해도 쓸 돈이 없다. 일상은 넉넉하지 않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돈을 위해 더 자신을 다그치고 옭죄지 않으면 안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거꾸로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일들 또한 많고도 많은데 그러나 그 가운데 내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자기가 어찌하기에는 어째서 그러한가 그 원인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째서 그러하고, 어떻게 해야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그 모순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그래서 쉬운 방법을 찾게 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 여겨지는 대상을 찾아 그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최진실이 악독한 사채업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나, 타블로를 공격하던 사람들이 학력위조가 만연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명에 불타올랐던 것이나, 설경구를 비난하던 이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하던 것이나, 낸시랭에 대해서도 방송의 공공재적 성격과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강조하여 말하고 있었다. 스포츠에서 편파판정이란 있어서는 안된다. 연예인이다. 더구나 외모가 아름답다. 편파의 이유가 된다. 일단 비난부터 하고 본다. 평소 음반도 잘 사지 않던 사람이 아이돌을 비난하며 피폐해진 대중음악의 현실을 말한다.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그들을 응징하여 사회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그들이 대변하는 모든 모순들이 정화될 수 있다. 강제로 징집되어 군복무를 하게 된 억울함을 한국국적이 아니기에 병역이 면제된 외국국적의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로 발산되는 것도 역시 같다. 국적이 외국인 것을 어찌하라는 것일까. 국적을 포기하면서까지 군대에 자원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지 그런 것을 모두에게 일반화시킬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에 분노하는가 묻고 싶어진다.

 

결국은 같은 것이다. 모두는 안다. 현실은 그다지 공정하지고 공평하지도 않다. 때로 모순되고 때로 그런 모순들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기란 힘들다. 그런 것은 대단한 지위와 신분에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소시민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에 불과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작은 것들 가운데도 뿌듯해할만한 큰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연예인들이다. 유명하지만 대중에 취약하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살기에 대중의 비난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어째서 타블로가 자신을 비난하던 대중을 고소하려 했을 때, 아니 그 전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그런 대중을 법정에 세우려 했지만 이내 그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포기하고 말았던가. 대중은 연예인을 비난할 수 있어도 연예인은 대중을 비난할 수 없다. 그런 대중에 대해 같은 대중도 비난해서는 안된다. 원래 마녀사냥을 할 때도 자신들에 위협이 될만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는 이들은 잘 건드리지 않았다. 유대인을 차별할 때도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다수의 힘을 빌어 그들을 억눌렀다.

 

말 그대로 대상이다. 공인이라는 이유다. 공적인 대상이다. 그래서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도 나오고 있지 않던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스캔들이 터지자 그것을 연예인의 스캔들로 무마하려 한다. 정치인의 스캔들은 부담스럽다. 어쩐지 정치인이란 멀고 위험한 느낌이다. 그에 반해 연예인은 아무렇지 않게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오히려 연예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쪽이 자신의 저열한 정의감을 충족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치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알려는 생각도 없다. 어째서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치적 이슈보다 연예인에 관련한 이슈가 더 극성스럽게 나타나는가.

 

분노해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불안한 것이다.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대신해서 풀어내려 한다. 발산하고 배설하려 한다. 어차피 대상이다. 실체가 없다. 연예인이란 대중과의 사이에 이미지로서만 만난다. 이미지란 인격이 아니다. 더 쉽다.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고 정의감을 충족시킨다. 현실의 불만을 잊고 뿌듯한 우월감마저 느끼게 한다. 저 대단한 연예인의 위에 대중인 자신이 있다. 과거 유대인과 백정, 마녀들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던 그 감정처럼. 불가촉천민이다. 그들이 현재를 유지토록 한다.

 

사회가 갈수록 보수화된다. 불만은 팽배한데 현상유지를 바라는 보수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간다. 연예인의 힘이다. 개인의 잘못이다. 개인의 탓이다. 특정한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나면 정작 사회는 전혀 아무문제없이 돌아간다. 가장 보수적인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몇몇 문제있는 개인들만 배제하고 나면 정의는 실현된다. 그들은 전사다.

 

우려스러운 이유다. 그러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저들의 비겁함은 인터넷을 벗어나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나약하다. 고작 키보드로밖에는 자신의 정의를 주장하지 못한다. 비판을 듣는 것조차 아파하고 두려워한다. 우리들 자신의 현실이다. 일그러지고 비틀린 괴물들인 것이다. 우습고 슬프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