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전효성과 민주화 - 분노를 넘어선 슬픔에 대해...

까칠부 2013. 5. 15. 17:09

슬프다. 최루탄으로 온통 거리가 안개가 낀 듯한 가운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서울의 골목을 내달리던 그들을 기억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개처럼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들려왔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거리에 나붙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불구로 사시다 가신 분도 계시다. 그날 광주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어이없이 사라져가야 했었다.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바로 어제 걸그룹 시크릿의 멤버 전효성이 방송에서 민주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개성을 중시하는 팀이기에 자신들은 민주화시키지 않는다. 분명 부정적인 의도로 쓰인 단어였다. 폭력성과 획일화, 그것은 과거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진 선배들에게 당시의 정권이 붙였던 '좌경용공'의 딱지와 닮아 있다. 투쟁의 과정에서 당연히 동반되었어야 할 폭력성을 폭력 그 자체로써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강요당했다. 민주화를 강요당했다. 그래서 민주화시켰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무심해서 잔인한 한 마디였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걸그룹 시크릿의 멤버 전효성이 입을 상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다. 모르고서 한 말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선배들의 바로 뒷세대였던 필자 역시 그 말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선배들이 그토록 피를 흘려가며 이루어놓은 민주화란 고작 그런 의미였는가. 그 무수한 죽음과 희생의 의미란 지금에 와서 고작 그런 정도에 불과한 것인가? 의도적으로 민주화라는 단어를 폄하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나마 그 의미나 무게에 대해 이해하는 경우다. 차라리 몰랐다.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더 아프다.

 

그만큼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간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토록 피를 토하며 외쳐부르던 민주화의 가치가 지금에 와서 그런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민주화의 반대편에 산업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운 특정세력의 승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필 민주화의 두 거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영삼 정부 시절 IMF가 찾아왔다. 바로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독재자에 불과하던 박정희가 경제난속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킨 구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적 무능과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가 충돌했다. 민주화정부에 대한 현실의 불만이 과거의 독재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더구나 시끄럽다. 허구헌날 다투고 싸우고 시끄럽기만 하다. 현실의 문제들은 전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IMF로부터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과 극심해지는 양극화, 갈수록 심해져가는 사회적 모순들,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 현실은 고단하기만 하고 그 책임을 돌릴 대상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더구나 효율일 것이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영웅적인 지도자가 있어 어리석은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해 강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여 의지를 관철해낸다. 그 과정에서의 작은 희생 정도야 모두가 누리게 될 더 큰 이익을 생각한다면 사소할 뿐이다. 고작 몇 명이나 죽었을 뿐이고 그나마 그 죽음조차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분노가 죽어버린 신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바로 그것이 민주화에 대비되는 산업화였을 것이다. 그래도 산업화되던 시기에는 모든 것이 문제없이 속시원하게 해결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다. 특히 젊은 세대는 더 그렇다. 입시지옥은 여전하고, 그 끔찍한 경쟁을 뚫고 대학에 진학앴어도 다시 취업이라고 하는 관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취업문은 좁고 설사 취업하더라도 충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없다. 무한경쟁사회에서 갈수록 작아지고 불안해져만 간다. 탓을 돌릴 누군가가 필요하다. 자신이 놓인 현실의 모순에 대해 책임을 지울 무언가가 필요하다. 젊은 세대에서 더욱 일베라고 하는 사이트에 이끌리고 지금처럼 아무 생각없이 민주화를 조롱하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막말로 민주화가 자기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앞으로도 그 잘난 민주화는 자신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군사독재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쓴 단어라는 것이 더 무서운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일상에 체화되어 있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민주화란 그런 의미다. 지금에 와서 어떤 젊은 세대들에게 민주화란 그런 가치일 것이다. 상처받게 되는 이유다. 고작 말 한 마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과격한 표현을 쏟아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고작 한 마디지만 하필 5월이라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이름붙여진 광주항쟁이 바로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다.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 심장의 귀퉁이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다. 고작 그런 정도를 위해 선배들은 그리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내던졌어야 했던 것인가. 선배들이 이루어낸 민주화라는 것이 지금에 와서 고작 그런 정도에 불과한 것인가. 회의다. 허무다. 자기부정이다.

 

굳이 전효성이라는 한 개인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 역시 악의로 그같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 터다. 그저 무심결에 일상에서 흔히 쓰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렸을 뿐일 것이다. 그렇게 만든 사회를 차라리 탓한다. 과연 누가 그녀에게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가르쳐줬을까?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하고, 민주화란 어떤 의미인가 제대로 설명해 준 이가 있기나 했을까? 이제 겨우 30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해명은 크게 의미가 없다. 어떤 해명으로도 이미 상처입은 많은 저들의 배신감과 허무를 달래지는 못할 것이다. 불과 30년만에 그들의 후예일 젊은 세대는 민주화를 그렇게 여기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써 민주화라는 단어는 쓰이게 되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런 말들이 공중파를 통해 나올 수 있다는 자체가 허무한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더 이상 걸그룹 시크릿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보기에는 너무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패배와 상실감으로 상처가 크던 그들일 것이다. 민주화란 그런 식으로 쓰여서는 안된다.

 

물론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역시 그러했었다. 혁명이 있으면 반동이 있다. 반동은 또다른 반동에 의해 정화된다. 군사독재의 반동이 민주화였다면, 민주화에 대한 반동은 지금의 달라진 민주화의 뜻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미 멈출 수 없는 당위일 것이다. 누구도 민주주의라고 하는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 과정에 대해 부정할 수는 있다. 누가 민주화를 일구었는가. 누가 이 사회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었는가. 아무 생각도 없을 테지만. 그래서 민주화라는 단어도 그런 식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그것은 또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돌아보기조차 싫은 사건일 것이다. 과격하게 쓰지 않기가 무척 힘들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전효성 개인에게 탓을 묻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도 그만큼 상처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날의 선배들이 흘리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에라도. 무심함이 더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서도 통하는 경우일 것이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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