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직장의 신 - 정규직 장규직의 직장과 그의 선택, 고백하다!

까칠부 2013. 5. 15. 09:10

그것은 비단 계약직만의 경우일 것인가? 필자가 잘못보았다. 황갑득(김응수 분) 부장이 정주리(정유미 분)의 계약해지결정을 철회한 것은 단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냈다는 만족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생겼다.

 

어차피 황갑득에게는 굳이 무정한(이희준 분)이나 정주리의 양보나 동의를 구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의도한대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정주리를 계약해지하고 그 기획안을 장규직(오지호 분)에게 넘겨 그의 것으로 만든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 장규직에게 기획안을 넘겼을 때 정작 무정한이나 정주리는 전혀 그런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기획안의 내용이 바뀐 것조차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기는 황갑득에게 일개 계약직에 불과한 정주리의 존재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 감히 자신을 거스를 수도 없고, 만에 하나 자신을 거스르려 해도 단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얼마든지 계약해지시켜 더 이상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 황갑득이 정주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거 불러서 가볍게 한 마디 언질만 주어도 충분하다. 문제는 정주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지시마저 거스르고 끝까지 계약직의 이름으로 기획안을 내려 한, 그리고 정주리를 계약해지하려 하니 자신의 뜻을 꺾으려 나서고 있는 무정한의 존재였을 것이다. 정주리야 계약기간이 끝나면 어쩌면 다시 볼 일이 없을 테지만 무정한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 무척이나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를 쳐낸다.

 

즉 대상이 바뀌었던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있는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정주리는 장규직을 동원할 수 없다. 미스김(김혜수 분)으로 하여금 나서도록 할 수도 없다. 그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팀장으로서 무정한이 가장 앞장서고 있다. 굳이 모양새도 안좋게 거절할 필요도 없지만 문제의 근원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지 차이라면 계약직이라면 계약해지만으로 아주 쉽고 간단하게 영영 보이지 않게끔 만들 수 있지만 정규직은 기껏해야 부장의 지위로도 좌천시키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계약직을 쓰는 것이다. 지방공장으로 좌천되어 갔어도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좌천되어 가 있는 동안에도 급여는 계속해서 지불된다. 하지만 계약직을 쓴다면 그날로 바로 계약해지하고 내보내면 그만이다. 판단은 부장인 황갑득이 한다. 결정도 부장인 황갑득에 의해 내려진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 또한 황갑득의 몫이다. 그것을 거스르려 한다면 마땅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고작 지방공장으로 좌천시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보다 갈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시키니까 한다. 입사동기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친구다. 가장 오랜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는 가장 친한 친구일 것이다. 그런 무정한이 정주리의 아이디어를 자기의 팀원들과 함께 구체화시킨 기획안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맡아서 추진한다. 바뀐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질조차 없다. 부장이 시키니까. 상사가 시키니까. 괜한 기대로 헛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말도 해줄 수 없다. 회사에 남아있기 위해서다. 회사에 남아 승진도 하고 책임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위치에도 장차 오르고 싶다. 그를 위해서라면 오랜 친구와의 - 그리고 가족과도 같은 동료들에 대해서도 잠시 접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조금이라도 상사의 지시를 소홀히한다면 무정한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역시 상사의 눈밖에 나서 모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갑을관계에서 을인 것은 정규직이나 계약직이나 같다.

 

장규직이 그토록 회사에 집착하며 계약직들에 매몰차게 대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장규직 나름의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회사의 눈에 들고 싶다. 상사의 눈에 들어 그의 선택을 받고 싶다. 회사에 남아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싶다. 그를 위해서 계약직은 물론 정규직인 동료들까지 이용한다. 가족이란 그를 위한 기만이다. 정주리의 기획안을 장규직의 것으로 돌리면서 '한 가족끼리'라는 말로 납득시키려 하는 황갑득의 모습처럼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편리하게 기대고 이용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때 그는 기꺼이 동료들을 외면하고 황갑득 부장의 지시를 쫓아 자신의 욕구를 쫓으려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은 도태될 것이고 어떤 기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장규직은 그토록 미스김에 대해 적대적인가. 비로소 이번 14화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유가 일부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어마무시한 자격증을 가지고 다니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김씨 당신 같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것은 분노였다. 분노 이전의 질투였다. 부러움이고 동경이었다. 그러나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부러움이고 동경일 터였다.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자기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회사에 얽매여 산다. 회사에 얽매인 채 회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맡긴 채 살아간다. 그녀는 이방인이다. 아니 외계인이다. 너무도 당연했던 자신의 일상을 깨뜨리는 존재다. 결국 그녀는 회사원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 했던 장규직의 결심을 무너뜨리고 그로 하여금 친구 무정한을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게 함으로써 그 우려와 두려움을 현실로 만든다. 그녀는 위험하다. 그녀는 자신을 망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성 앞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번식을 하는 존재들의 공통된 본능일 것이다. 경멸당하고 싶지 않다. 혐오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목숨을 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리고 고백을 한다.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고 나온 그날 장규직은 미스김을 찾아가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것은 파국인 동시에 희망이라고 하는 이율배반적 의미를 갖는다. 껍질을 깨서 부수고 새롭게 자신을 찾아간다. 장규직이 가지고 있던 공포의  정체는 다름아닌 희망이었던 것이다.

 

결국 크게 다르지 않다. 상사인 부장의 뜻을 거스르다가 좌천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는 무정한이나 부장에게 밉보여 고작 한 달만에 계약해지를 당할 위기에 놓였던 정주리나. 혹시라도 계약연장에 실패할까봐 온갖 눈치를 보며 주눅들어 있는 정주리의 모습과도 친구마저 외면한 채 상사의 뜻을 쫓아야 하는 장규직의 모습도 닮아있다. 무정한을 찾아가 화를 내고 싸움을 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장규직의 양심이 견딜 수 없다. 차라리 계약해지를 당한 것이 자기 잘못이기를 정주리는 바라고 있었다.

 

하기는 황갑득 부장 역시 입장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리자로서 최고경영자에게 그 실력과 실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아직도 황갑득의 위에는 그가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많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회사에 중요한 존재로써 남아있고 싶다. 그래서 무정한을 다그치고, 정주리를 계약해지하고, 장규직으로 하여금 그들의 기획안을 가져가도록 등을 떠민다. 정글이다. 한 순간도 다른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정글. 모두가 승진할 수는 없다. 모두가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있을 수는 없다. 선택된 소수에 속하기 위해 모두는 필사적이다.

 

확실히 어떤 집단이든 일정규모 이상 몸집을 키우게 되면 관성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수집되었다. 그동안의 성공에 대한 경험도 있다. 실패를 경험하는 그 순간까지 사람은 성공한 자신에 갇히고 만다. 새로운 참신한 기획이 있어도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방법이란 이미 익숙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어떤 것일 터다. 굳이 남들도 하지 않고, 더구나 비용까지 더 드는 지나치게 생소한 방법을 선택할 까닭이 뭉 있겠는가? 더구나 그 선택에 수많은 구성원들의 앞날이 걸렸다. 사회초년생이기에 가능한 대담한 기획과 오히려 베테랑이기에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경험의 함정이 절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다. 더 이상 실력만으로 위로 오르기에는 너무나 회사의 구조가 안정되어 있다.

 

지난회까지가 정주리 등의 계약직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이번회차는 무정한과 장규직이라고 하는 계약직이 보기에 혜택받는 정규직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정규직은 계약직에게 갑일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같은 노동자일 뿐이다. 해고되기 싫어 눈치를 보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잠시 자신을 속이기도 하는. 바로 그것이 직장이라고 하는 현실이다. 그 극치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주인공인 미스김의 존재다. 그녀가 직장의 신인 이유다.

 

그녀는 자유롭다. 화가 날 정도로 자유롭고 당당하다. 모두가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이르지 못하는 저 먼 곳일 터다. 그곳에 미스김은 존재한다. 모두는 이쪽에서 직장이라는 굴레에 구속되어 버둥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자신과 주위마저 속여가며. 장규직은 그런 미스김에게 취해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나마 사랑은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스김에게 달려있다.

 

무엇을 위한 직장인가? 무엇을 위한 삶인가? 자신은 누구인가? 직장인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누군가의 친구이고, 또한 동료에게는 자신 또한 동료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을 희생하고 만다. 희생한 것일까? 아니면 얻은 것일까? 삶이란 이토록 처절하고 치열하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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