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유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솔직함과 진실함은 그러나 영리하지 못한 어리석음이며 미숙함일 수 있다. 조금더 세련되게, 조금더 멋지게 꾸미면서 사랑도 할 수 있다.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그 직설적인 감정의 표현들이 그래서 아쉬울 수 있다. 하물며 나이도 서른을 넘긴 어른들이 그러고 있다. 어색하고 부대낀다. 유치해진다.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무엇으로써 김수영(신하균 분)과 노민영(이민정 분)의 관계를 순수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김수영과 노민영의 사이를 순수라 정의한다면 그렇다면 순수하지 못한 관계란 어떤 것인가? 순수하지 못한 관계란, 사랑이란, 만남이란, 인연이란, 맺어짐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순수하지 못한 현실과 대비될수록 순수는 더 선명하게 시청자에게 각인될 수 있다. 이토록 혼탁하고 추악한 가운데서도 이들은 이렇게까지 순수하다. 유치한 것도 그렇게 순수라는 이름으로 판타지가 되고 신화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해맑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정치인들이었을 것이다.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는 함량미달의 국회의원들이었을 것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탈법을 행한다. 편법까지 동원해 자기의 이기적 욕심만을 채우려 한다. 국회의원으로써 유권자가 바라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세비나 축내며 시간만 보내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야 말로 김수영과 노민영이 놓여 있는 현실 그 자체일 것이며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과 노민영이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들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무런 악의도 드러내지 않는 상대와 어떻게 싸우겠다는 것일까? 마치 아이처럼 천진스럽기까지 하다. 짓궂은 아이들이 학교수업을 빼먹고 선생님들 모르게 놀러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것마냥 어둡거나 음험한 구석 없이 유쾌하기까지 한 밝은 모습들이다. 김수영과 노민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수영과 노민영이 순수하다면 당연하게 본능이 이끄는대로 행동하려는 이들의 모습 또한 순수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순수하다면 김수영과 노민영의 관계에서도 결국 남는 것은 나머지 유치함일 것이다. 어차피 모두가 밝게 웃고 떠드는 코미디인데 김수영과 노민영의 사이라고 진지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로맨스다. 로맨틱 코미디다. 매력적인 신하균과 이민정 두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멋있어야 한다. 아름다웠어야 한다. 시청자에게 판타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한 바탕의 요란스러울 정도로 유쾌한 코미디의 가운데 두 사람의 사랑마저 한 바탕의 우스꽝스러운 사랑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유치한 사춘기 소년소녀의 말이나 몸짓들은 그대로 어울리지 않는 옷이 되어 웃음을 자아내고 만다. 한 마디로 로맨스로서의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어떤 간절함도 절실함도 없이 코미디처럼 그저 웃고 만다.
고대룡(천호진 분)의 역할이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충분히 다수당인 여당의 대권을 노리고 있는 당대표로써 김수영의 캐릭터와 대척점을 이룰 수 있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김수영이 그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대립구도에 비극적 의미마저 더한다. 야심을 위해 김수영을 옭죄려 들고, 김수영을 이용하고자 노민영과의 관계마저 방해하려 한다. 고대룡이 가진 권력이라면 충분히 김수영과 노민영을 곤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극복하고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돌아버리겠다던 안희선(한채아 분)의 다짐도 어느새 공허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악녀가 되려는가 생각했다. 자신을 기만한 김수영과 노민영에게 분노하여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다른 악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민영을 곤란에 빠뜨리겠다고 다짐하고서도 끝내 그녀에게 불리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을 주저하고 망설인다. 애매하다. 그렇지 않아도 김수영과 노민영도 착한데 노민영의 반대편에 있는 안희선마저 착하다. 김수영의 반대편에 있는 송준하(박희순 분) 역시 악한 존재가 아니다. 김수영과 주먹다짐은 해도 그를 함정에 빠뜨릴만큼 독하지도 음험하지도 않다. 애초부터 이들로 인해 어던 갈등이 발생하게 될 것이란 기대는 무리였던 것이다.
그나마 안희선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로 냈다. 그로 인해 노민영은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궁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굳이 자신을 찾아온 송준하 앞에서 팩트를 이야기하고, 김수영 앞에서는 투정부리듯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역시나 음험한 악의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철부지 어린아이가 홧김에 사고를 친 듯한 모습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시 김이 빠진다. 고작 그런 정도의 위기다.
혹시나 생각해 본다. 이 드라마가 수, 목에 하는 미니시리즈가 아닌 매일 방송되는 일일시트콤이었으면 어땠을까고. 매일 방송되는 일일드라마라면 굳이 서두르며 인위적으로 긴장을 부여할 필요가 없다. 긴 호흡으로 매일의 에피소드에 집중하며 장면장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노민영과 고동숙(김정난 분)을 대상으로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내던 대한국당의 동료의원들을 화장실에서 혼을 내던 것처럼 말이다. 그저 그런 모든 것이 가벼운 평소의 일상이다.
하지만 하필 드라마는 수목드라마였다. 분량도 짧은 미니시리즈였다. 일상에 지친 시청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짧은 호흡으로 주어진 분량 안에서 최대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쟁작들도 바로 그같은 주간 미니시리즈의 문법에 충실한 드라마들이다. 축구장에서의 공을 이용한 사소한 복수보다는 보다 스케일있는 집중할 수 있는 음모와 계략들이 그와는 어울린다. 재미없는 이유가 있다. 인기없는데는 다 인기없는 이유가 있다. 비로소 납득한다.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시청률이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현실을 이야기한다. 노민영의 잘못이다. 현역 국회의원이다. 법을 발의하고 사회적 모순들을 감시하고 파헤쳐 그 대안을 제시한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이 사회에, 나아가 개인의 일상에까지 적잖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무리 조카라고, 아무리 이모가 조카를 맡아서 보살피고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사회로부터 많은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공인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카 보리(전민서 분)가 어떤 학원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가. 하물며 그녀는 현재 교육현실의 모순과 비리들을 밝혀내려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이모와 보리가 그녀의 반대편에서 그녀의 주장과 배치되는 이익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면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주장은 힘을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 편으로 안희선 기자가 말하는 팩트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쓰러져 있는 사람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누군가의 연인이 외간남자와 바닷가에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 기절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가슴을 때려 심장에 충격을 주러던 중이었다. 물에서 건져낸 남자에게 인공호흡으로 숨을 불어넣으려 하던 중이었다. 사실과 진실이 갖는 차이일 것이다. 원래 기자란 진실을 추구하던 직업이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기자가 많은 시대에 지식인으로써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처 보여주지 못한 진실을 보고 만다.
공인으로서의 처신을 말한다. 기자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말한다. 하물며 안희선은 노민영의 뒤를 캐며 사심을 담고 있었다. 없는 약점조차 만들어 얼마든지 상대를 궁지로 내몰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비록 망설이기는 했지만 개인적 감정을 위해 사용한다. 언론과 정치인의 관계다. 그리고 정치인의 책임이다. 걸핏하면 가족을 들이며 몰랐다고 말한다. 통렬한 풍자인 동시에 대안이다. 그래서 옳았는가. 노민영도 썩 훌륭하지는 않다. 의도는 순수했을지 몰라도 결국 타인과 타인을 잇는 것은 사실, 그리고 의미다. 그것이 아쉽다.
너무 밋밋하다. 착한 건 좋은데 지나치게 조용하다. 왁자하게 사건도 일어나고 해야 하는데 말썽없이 여전히 한가하기만 하다. 지루하다. 긴장마저 풀린다. 그저 유치하게 시시덕거리는 김수영과 노민영 커플만을 지켜봐야 한다. 충분히 매력있는 두 사람이지만 드라마의 재미로서는 한계가 있다. 새삼 깨닫는다. 무엇이 지금 드라마에는 필요한가. 안타깝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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