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특수사건전담반TEN2 - 그리고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었다.

까칠부 2013. 5. 20. 11:12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일까? 불행만 없으면 과연 행복해지는 것일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들만 없어지면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양선화는 그렇게 절규하고 있었다.


"이제 행복하길 꿈꿀 희망도 없어!"


행복이란 현재의 가치가 아니다. 미래의 기대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어서. 차라리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어서. 그래서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당장은 원통하고 절망스러워도 그래도 살아갈 수 있기에 살아갈 힘도 낼 수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는 시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기대따위 없을 수도 있다. 대신 탓을 한다. 원망을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위로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력하는 자신에 감탄도 한다. 그런데 아무런 노력 없이 시어머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더 이상 미워할 상대도, 원망할 상대도, 그리고 노력할 대상도 없다. 행복할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딸이 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딸아이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유치원 원장은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딸이 죽은 슬픔은 이내 책임을 회피하려는 원장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죽을 것만 같은 슬픔이고 절망일 테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누군가가 있기에, 그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원망할 수 있기에 그래도 잠시나마 그 지옥같은 슬픔을 잊을 수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원장에게 그 죽음의 책임을 묻고야 말리라.


더구나 남편 성재민과의 사이에서 더욱 그녀를 좌절케 한 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할 남편의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던 시어머니가 죽었다. 딸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유치원 원장 또한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고 있었다. 그런 아내가 남편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꺼리고 경계한다. 심지어 절대 물어서는 안되는 것까지 묻는다. 딸까지 미워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양선화는 마지막까지 남편 성재민과의 관계회복을 꿈꾸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죽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해를 푸는 것도,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는 것도, 인정을 받는 것도, 그 책임을 묻는 것도, 하다못해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까지. 미워하는 것도 상대가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원망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 해결될 수 있기를 기대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저 미워만 하고 원망만 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과연 행복이겠는가? 불행이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그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양선화가 진정 분노한 것도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남편 성재민이 죽어버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이런 말도 안되는 오해만을 남긴 채 그는 무책임하게 죽어버리고 말았는가.


범인 도성규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성규 역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가장 끔찍한 죄를 수단으로 삼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혐오한다. 그러면서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래도 의미가 있다. 그래도 가치가 있다. 누군가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럼으로써 사람을 죽여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배반당하는 순간 그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칼로 찌르지 않았어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성규는 양선화에게서 살아갈 의미를 빼앗았고, 양선하는 그에게서 살아갈 이유를 빼앗았다. 어긋난 선의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역설일 것이다. 고작해야 잠시 스친 인연이었을 것이다. 도성규가 첫살인을 저지른 그날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대상으로 양선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딸이 아파 서둘러 약을 사가지고 돌아가야 하는 양선화를 그는 그냥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양선화가 돌아서며 건넨 "고맙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이 모든 일들의 시작이었다. 하기는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누군가로부터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때로 그것이 자신의 일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던 도성규이기에 더욱 그 한 마디는 구원과도 같이 여겨졌을 것이다. 죄로 만났지만 선의로 대했고 그 선의를 선의로 보답하고자 했다. 하지만 죄에 물든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선의란 또다른 죄일 뿐. 양선화의 비극인 동시에 어쩌면 도성규 자신에게 있어 더 큰 비극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는 자신의 고마움을, 선의를,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인가? 후회할 기회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드라마는 마치 여백처럼 도성규를 죽인 또다른 도성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던 것일 게다. 여동생을 둘이나 두고 있는 오라비였을 것이다. 그저 뒤에서 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다 그랬다. 그랬더니만 배에서 내리니 칼을 들고 그리로 가라고 말했다고. 그러고 보면 사람을 죽인 것치고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백독사(김상호 분)에게 잡히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꼬깃한 지폐다발을 받은 돈이라 내미는 그 모습에서는 어떤 악의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련함만이 느껴질 뿐. 하지만 바로 그 손은 이미 사람을 죽인 죄의 손일 것이다.


가난에 쫓겨서. 고단한 삶에 내몰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론 다른 선택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더 많은 사람들은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죄를 지은 이상 그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것은 재판정에서 법에 의해 판사가 판결하는 것도, 그렇다고 교도소에서 몇 년 썩는다고 씻겨지는 것도 아닌, 오롯한 자신의 죄인 것이다. 스스로 원한 선택이 아니었기에 후회조차 더 큰 죄가 되어 환멸로 돌아온다. 구원조차도, 그를 위한 선의의 보답조차도 그래서 결국은 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더 큰 죄를 지은 자는 따로 있으련만. 인간은 그래서 슬픈 것일까?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면서도 그런 인간들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미워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백독사는 말한다. 행복이란 어쩌면 무척이나 간단하고 쉬운 것이라고. 그런데 굳이 어렵게 먼 길을 돌아가려 하고 있다고. 그의 앞에는 그로 하여금 사건까지 외면하게 만든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 그녀에게는 사랑스러운 딸도 있다. 그에게도 이제 봄이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전형적이었을 것이다. 도식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선의에도 감사해하고, 그러나 그 선의가 다시 죄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약한 것이 인간이다.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했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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