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은 대부분 고아들이다. 부모가 죽었거나, 혹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아니면 아예 부모 없이 태어난다. 심지어 부모를 죽이는 경우마저 있다.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초이며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 그들은 영웅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결코 혼자일 수 없다. 태어나기는 혼자서 태어나지만 자라는 동안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고, 몸이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며, 정신과 실력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가르침 또한 준다. 아니 마지막은 굳이 없어도 상관없다. 태어나기를 혼자서 태어났듯 정신과 실력 역시 혼자서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말이다. 설사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더라도 마침내 그들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영웅에게 있어 예정된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단지 그 과정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최근의 여러 사극들에서 하나같이 주인공의 탄생과 관련해 구구한 사연들을 풀어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웅적인 주인공의 탄생은 남들과 달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적이어야 한다. 비극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이야 말로 영웅의 자격이 있다. 민중이 사랑하는 영웅이란 누구보다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이되 그 출발은 자신들과 같은 - 혹은 자신들보다도 더 비천한 보잘 것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부터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처음부터 고귀한 존재였던 신성한 존재는 우러름은 받을지 몰라도 민중의 사랑은 받지 못한다. TV드라마란 바로 그같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통속드라마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한국인만의 고유한 어떤 직업관일 것이다. 단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좋아서. 단지 음식을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들과 차별되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높은 지위와 명성과 그리고 부와 권력. 복수는 그 가운데서도 필연이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든 대단한 상대에 대한 복수는 그런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싸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더 높은 지위와 명성과 부와 권력을 지닌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그와 필적할만한 위치에 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궁극적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주인공은 자신의 원수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대신해서 가지게 된다. 물론 복수가 이루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은 별개다. 이루고 떠나는 것과 처음부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까.
확실히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라고 하는 설정만이 다를 뿐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이고 전개였다. 하필 도자기를 가지고 도공들끼리 승부를 겨루고, 그 승부의 결과 승자가 관요 도공의 장인 분원의 낭청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배후에는 인민 김씨(한고은 분)과 이조판서 이평익(장광 분)이라고 하는 권력의 실세가 도사리고 있다. 승부 역시 이들의 개입으로 인해 음모에 의해 결정나고 만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드는데 왕이 나오고, 왕자가 나오고, 왕실과 조정의 실세들이 등장한다. 그들 사이의 힘겨루기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기는 그만큼 정치적인 이슈가 개개인의 현실과 일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도자기를 만들어도 시대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도자기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다.
대중문화라고 하는 자체가 결국 동시대의 반영인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현실과 그에 대한 무의식이 허구인 드라마에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그럴 것이다. 그리할 것이다. 그럴싸하다. 그럴 것 같다. 설득당하고 싶기에 설득된다. 납득하고 싶기에 납득하고 만다. 번거롭게 일일이 살피고 따져가며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만들어도 항상 높은 시청률과 함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다. 나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대중드라마다. 대중을 상대로 한 통속드라마다. 예술작품이 아니다. 대중이 재미있어하고 만족할 때 드라마는 작품이 된다. 관건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것이다.
소재가 좋다. 도자기와 도공에 대해서는 단편으로는 적잖이 다룬 바 있지만 장편으로는 거의 처음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드라마의 전통이 되어 버린 출생의 비밀과 복수라고 하는 플롯 역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권력투쟁 역시 스케일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을 만족시킨다. 아마도 선조연간이고 광해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역사의 격랑 속에 대중의 흥미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다.
아버지가 딸을 죽인다. 자신의 딸을 임신한 여인을 죽이려 한다. 아버지를 포기한 남자가 강제로 범하여 임신시킨 여인이었다.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지만 없다. 형제가 있지만 없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끝까지 가기에는 한국사회에서 혈연이 갖는 의미란 매우 남다르다. 장차 왕이 될 남자와 인연으로 얽힌다. 하필 초유의 전란이 예고되는 시대를 그들은 모른채 살아간다. 신화적인 운명과 역사의 숙명이 서로 얽힌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아쉽자면 아무래도 이 역시 요즘의 추세인지 고작해야 상민의 자식에 불과한 김태도(아역 박건태)가 아무리 낮춰잡아도 양반의 자제로 여겨지는 이를 상대로 지나칠 정도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기는 그러니까 일개 도공의 딸에 불과한 주인공 정이(아역 진지희 분)가 왕자인 광해군(노영학 분)과 인연으로 얽힐 수 있는 것일 터다. 도저히 어울릴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말했듯 판타지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직업이 무엇이든 왕실과 조정의 대신들과 크고작은 인연을 가지고 시작한다.
백자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조선의 백자는 조선에서밖에 만들지 못한다. 조선왕조의 궁궐을 보더라도 바닥에 깔린 석판들은 하나같이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 요철까지 져 있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조선의 미학이었다. 인위를 최대한 배제한 무위의 자연스러움이다. 심지어 기본적인 대칭조차 맞지 않는 도자기가 적지 않다. 잘못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조차 그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야 촌스럽고 투박한 도자기들이지만 그러나 아무데나 놓아도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조선에서는 집을 지어도 그 지붕이 배경이 되는 산의 능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선조(정보석 분)가 눈이 높은 게 아니라 이강천(전광렬 분)이 특이한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과연 당시 전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만이 만들 수 있었던 최첨단기술의 집약체였다. 조선에서도 중기 이후에나 완전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을 뿐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백색유약을 두껍게 바른 분청사기로 백자를 대신하려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거래된 것이 바로 이 백자이고 보면 그 평가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강천이 낭천으로 임명된 분원은 관용자기를 생산하여 보급하는 관청으로 조정에 의해 관리되던 관요였다. 아무리 왕의 후궁이고 조정의 고관이라 할지라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왕실과 조정에 납품되는 분요의 자기에 손을 대기란 힘들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단지 왕실과 조정의 실세가 개입할만한 명분을 주기 위해 약간의 설정을 가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진다.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반복해서 대중을 만족시켜왔다는 뜻일 것이다. 대중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다시 대중 앞에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실패하는 그 순간까지 답습된다. 그만큼 먹히는 구성이고 전개일 것이다.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뻔히 예상하면서도 그 자체를 어느새 즐기게 된다.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익숙하기에 재미있다. 낙관하는 이유다.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드라마일 것이다. 재미있을만한 요소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비슷한 구성의 드라마 '마의'가 바로 3월 말에야 종영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시작은 아직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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