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란 엄격한 규칙이 아니다. 음악을 나누는 단위도 아니다. 단지 방식이다. 음악을 표현하고 향유하는 방식. 트로트가 록이 된다. 트로트가 댄스음악이 된다. 블루스가 되고 재즈가 된다. 트위스트가 트로트로 불려진다. 차차차가 트로트로 들린다.
설운도란 그런 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단한 음악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트로트가 일본의 엔카와는 달리 젊은 세대에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세대를 아우르는 그야말로 대중'가요'로써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끊임없이 다양한 새로운 장르와의 접목을 통해 특정한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꾀한다. 그리고 그같은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성공적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던 이가 바로 오늘의 전설 설운도였을 것이다.
트로트의 정석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트로트가 추구하는 본질을 잃지 않는다. 트로트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도 일정한 형식에서 벗어난 다양한 개성과 매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음악들은 젊다.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성으로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선배음악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설운도가 최초이거나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선배음악인들이 있었고 동시대에도 동료트로트음악인들이 있었다. 다만 설운도이기에 가능했던 자신만의 영역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연 박현빈과 홍진영의 트로트가 다르다. 같은 노래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부른다. 설운도 역시 태진아나 송대관과는 전혀 다른 트로트를 부른다. 그래서 하춘화와 같은 이는 트로트가 아닌 '가요'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같은 모든 시도들을 아우르는 것이 한국의 '트로트'인 셈이다. 트위스트도 차차차도 삼바도 설운도에 의해 '트로트'라고 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에 들려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설운도의 노래들이 문명진과 바다, JK김동욱 등에 의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음악인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무대로 모일 수 있었다.
아무튼 정인의 '다함께 차차차'는 그야말로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신명 그 자체였다. 절망으로부터 희열에 이르기까지. 가장 슬픈 감정에서부터 그 슬픔을 이기고자 조금씩 힘을 내는 사이 어느새 그 슬픔조차 즐기며 누구보다 기쁘게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슬픔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다함께 차차차'의 노랫말 아니었던가.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무대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과연 정인. 가수의 이름이다.
홍경민의 '너만을 사랑했다'는 복고적인 클럽느낌의 펑크리듬으로 재해석되고 있었다. 그리우면서도 흥겹다. 색이 바랜 듯 그러나 선명하다. 전설 설운도를 위한 무대이기도 하기에 그를 향한 홍경민의 헌사가 유쾌하게 들리기도 했었다. 다만 단조로웠다. 한 편의 드라마를 모두 보는 듯한 정인의 무대가 갖는 다이나믹함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즐겁기는 한데 놀라게 하지는 못한다. 경연이라는 것이 아쉬울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웠다.
과연 JK김동욱이었다. JK김동욱의 '잊으리'는 블루스이면서도 스탠다드였다.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영어로 부르는 것 같다. 당연하다. 40년대 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스탠다드가 바로 이와 같았을 테니 말이다. 묵직하면서도 매력적인 저음이 힘있는 고음과 어우러지며 세련된 기교와 만난다. 기름을 칠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잡스런 것은 배제한 담백함이 느껴진다. 미국에 한 번 가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도 좋다. 복고의 무대가 어울린다. JK김동욱의 목소리에는 깊이가 있다. 더불어 50년대 한국의 가요도 스탠다드를 따르고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바다라는 느낌이었다. '나침반'이라는 노래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바다만의 무대가 펼쳐지는 듯 보였다. 여전히 댄서들과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댄서들과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단지 분노하고 있었다. 처음의 귀엽게까지 느껴지던 혼란과 당황이 이제는 답답한 분노가 되어 터져나온다. 이런 노래였구나. 이런 가사였구나. 원곡자인 설운도의 설명이 해석에 설득력을 더한다. 갈 곳을 잃었을 때 사람은 당황하고 답답한 자신과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저 슬퍼만 하기에는 그런 현실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이제는 아예 놀랍지도 않다. 바다에게는 저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저 대단할 뿐이다.
문명진의 '여자여자여자'는 전혀 다른 노래였다. 트로트가 알앤비가 되었다. 전혀 다른 장르의 문법으로 재해석되었다. 아니 완전히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되었다. 흑인음악 특유의 소울이 트로트만의 뽕끼를 대신한다. 완벽한 문명진의 노래였다. 문명진의 무대였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는 문명진이었고 노래는 문명진의 '여자여자여자'였다. 내내 무대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와 감정이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수였다.
이기찬의 목소리는 고급스럽다. 세련된 느낌을 준다. '사랑의 트위스트'가 재즈로 바뀐다. 나른한 섹시한 느낌과 분위기가 원곡을 충실히 살리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들려온다. 절로 발바닥으로 바닥을 비비게 만들던 흥겨운 노래가 귀기울여 듣게 만드는 노래로 탈바꿈한다. 다만 뒤로 가면서 폭주하기 시작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차라리 처음부터 잔잔하게 듣는 노래로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경연을 너무 의식한 것이 오히려 한계로 다가왔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순서도 나빴다. 어쩔 수 없는 결과라 생각한다.
노래에 장르란 없다. 단지 그것을 만든 작곡가와 부르는 가수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노래를 어떻게 무대에서 대중들에 들려줄 것인가.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이 스타일을 만든다. 일정한 유형의 스타일을 장르라 부른다. 가수가 다르다. 전혀 다른 노래가 된다. 하지만 노래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선배와 후배가 있다. 오로지 가수들만이 있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웃는다. 승자는 패자를 위로해주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해준다. 그리고 결국 대기실에서 다시 모인다. 경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경쟁이란 단지 보다 즐겁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더 좋은 노래와 그보다 더 좋은 무대를 위해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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