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란 판단을 자기로부터 유리시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역지사지란 상대의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상대의 입장을 긍정하거나 동의해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상대로부터도 유리시킨다. 자신도 상대도 아닌, 그러면서도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무언가를 찾아낸다. 이성이란 이상이고, 이상은 상상이고 추상이다. 추상은 가장 고도의 지적능력일 것이다.
억울하다. 분하다. 화가 난다. 원통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감정일 뿐이다. 자기라고 하는 개인이 느끼는 감정일 뿐 모두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무언가는 될 수 없다. 상대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다. 충분히 이해 한다. 어머니가 죽었다. 그것도 살인자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과거 자신이 증언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어머니마저 잔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할까.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원통할까. 하지만 그것 역시 - 아니 그조차도 자신이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일 뿐 실제 상대가 느끼는 감정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내가 그렇게 말해서 상대도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인지. 과연 그런 것들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도 좋은 것일까.
정의와 정의감이 다른 이유일 것이다. 정의란 오롯한 것이다. 가장 명징한 객관일 것이다. 판단의 규준이 되어준다. 특정한 어느 개인이 아닌, 특별한 어떤 사정이나 사연에 의한 것이 아닌, 모든 개인과 모든 상황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보편의 무엇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로 인한 것도 아니고 너로 인한 것도 아니다. 누구에 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의감이란 바로 자신에 의한 것이다. 자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기에 특정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것을 정의감이 아닌 정의 그 자체라 착각하기 쉽다는 것일 게다. 마치 서도연(이다희 분)이 정작 장혜성(이보영 분)의 어머니가 살해당한 사실에 대해 더 원통해하며 도리어 당사자일 장혜성을 몰아세우던 장면처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장혜성의 억울함이나 원통함조차 서도연은 장혜성 자신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장혜성을 가르치려 들며 야단까지 치고 있다. 그같은 서도연의 오만은 최종진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장혜성이 당사자였다. 당시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가 다름아닌 장혜성 자신의 어머니였다. 억울해도 장혜성이 더 억울하고 원통해도 장혜성이 더 원통하다. 그런데도 서도연은 마치 그것들이 자기의 감정이기라도 한 듯 배심원들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부조리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범인이 거의 확실한 피해자를 풀어주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에 비해 장혜성은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오히려 자신이 당시 느꼈던 분노와 절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그럼에도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배심원의 이성에 묻고 있었다.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옳은 판단인가.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지금 자신들의 판단에 후회가 없을 것인가.
비로소 장혜성도 이해하게 된다. 여전히 민준국을 변호하여 무죄로 풀려나게 한 차관우(윤상현 분)을 용서할 수 없다. 아니 용서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무리다. 당시의 재판에 대해 정당했다고 말해야 하는 자신조차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통곡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렇게 여겨야 한다. 다시 변호사 배지를 단다. 그것이 변호사다. 그것이 재판이다. 그것이 정의다. 만일 당시 위증을 사주하면서까지 피의자를 유죄로 만들려 했던 서도연의 정의감이 옳았다면 지금도 서도연에 의해 짜맞춰진 불완전한 퍼즐에 의해 자칫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해 처벌받을 상황에 놓인 박수하(이종석 분) 역시 옳을 것이다. 박수하가 죄가 없다면 마찬가지로 민준국 역시 최소한 법정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변호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차관우가 해야 했던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서도연은 이해하지 못한다. 역시 여전히 정의감과 정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인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처벌해야 한다. 범인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법에 의해 처벌을 받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장혜성의 경우와 같은 억울함을 없애는 일이다. 그것이야 말로 검사로서 자신이 해야 할 가장 옳은 일일 것이다. 아니 재판부는 물론 변호사인 장혜성 역시 그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굳이 장혜성의 사건을 최후진술에서 끄집어낸 이유도, 장혜성을 도리어 그 일로 비난하고 마는 것도 결국 그래서일 것이다. 차관우의 말을 듣고 박수하를 신고한 상점 주인을 찾아가서도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은 옳다. 비로소 서도연은 완벽히 장혜성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흥미로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의미심장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가족으로써 살인혐의를 쓰고 있는 박수하를 변호해야 하는 입장인 장혜성과 정작 타인이면서도 오히려 장혜성 자신보다도 더 사건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며 감정에 호소해 오는 서도연의 대비란라는 것은. 이성과 감정이다. 보편과 개별이다. 개별의 감정과 판단이 중요하다. 개별 사건의 사례가 더 중요하다. 그보다 모든 사건과 피의자에 대해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살해당한 피해자인 어머니의 딸이기도 하지만 살인죄를 쓰고 재판을 받고 있는 박수하 또한 자기에게 소중한 존재다.
깨닫는다. 이 또한 편협한 감정이다. 여전히 감정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차관우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진다. 자신은 변호사다. 법과 정의와 재판이라고 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압축해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려 시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와 같은 눈높이에 있을 배심원 역시 장혜성의 손을 들어준다. 잘못된 판단으로 성급하게 판결할 경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지 모른다. 책임을 지기 싫다. 이기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정의이기도 하다. 정의감을 정의와 착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의에 모든 것을 맡긴다. 판단이 사라진다.
전혀 다른 드라마가 되어 있었다. 박수하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 충분히 성인인 장혜성과 사랑을 나누어도 될 나이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으로 오히려 조금은 위에서 장혜성을 굽어보며 도움을 주던 박수하의 모습도 없었다. 오히려 길잃은 강아지마냥 비를 맞으며 애처롭게 장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되어 버렸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되바라진 박수하 대신 여전히 아이의 모습인 박수하가 되어 장혜성의 품으로 기어든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던 장혜성은 어른이 되어 그런 박수하를 보살핀다. 심지어 사랑의 감정마저 느끼게 된다. 박수하의 초능력은 영영 사라진다.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박수하의 기억이 단절되며 드라마의 이전과 이후 역시 단절되어 버린다.
항복선언일 것이다. 너무 성급했다. 너무 준비가 부족했다. 박수하의 사람을 읽는 능력을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흥미로웠을 박수하의 능력이 드라마의 밸런스를 해치고 중심을 흐트러 놓는다.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의 다른 이야기로써 드라마를 이어간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자기 모습을 찾는다. 그나마 민준국이 남아 있다. 박수하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뻔한 로맨스로 흐르는 가운데 변수가 주어진다. 평범한 내용으로도 무척 재미있고 좋다. 무리한 시도는 작가나 시청자나 모두가 피곤하다. 제자리를 찾아간다. 대중적으로도 호응이 높다. 버거운 시도였을 것이다. 반가워해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무죄추정의 원칙인가. 자신의 정의감이 편견일 수 있다. 유죄라 여겼던 판단이 잘못된 편견으로 인한 오류일 수 있다. 감정을 뒤집었을 때 전혀 다른 논리와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장혜성은 그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옳지도 않다. 세상에는 민준국도 있지만 박수하도 있다. 서도연이 보기에 차관우나 자신이나 전혀 다르지 않다. 차관우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울음이 터져나온다. 껍질이 깨진다.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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