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민준국과 박수하, 당신처럼 짐승으로 살지 않을 거야!

까칠부 2013. 7. 12. 07:51

결국 그렇게 흘러간다. 민준국(정웅인 분)에게도 감춰진 사연이 있었다. 아들이 죽었다. 박수하(이종석 분)의 아버지에 의해 자신의 아들이 죽고 말았다. 차오르는 분노가 그를 복수로 내몰았다. 넘치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슬픔이 자신마저 삼켜버리고 말았다. 돌아올 수 없다. 아니 돌아갈 곳도 없다. 이대로 끝까지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어쩌면 아들이 죽던 그 순간 아버지 민준국 역시 죽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민준국이 죽고 그 이름과 형상을 빈 껍데기만이 남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민준국의 마지막 기억으로 아들을 죽게 만든 당사자 - 아니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방치하고 방관한 세상에 대한 증오만이 그 텅 빈 껍데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증오만이 그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 민준국은 동요하고 있었다. 장혜성의 어머니 어춘심(김해숙 분)이 생일이라고 따로 음식을 장만해 전해주었을 때, 어춘심이 보여준 진심어린 친절들이 죽은 줄 알았던 그의 양심과 이성을 일깨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죽였다. 그래서 굳이 서둘러 일부러 더 잔인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진짜 돌아갈 곳이 없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따로 준비한 복숭아가 그의 결심을 재촉한다.

 

자괴감이다. 자기멸시고 환멸이다. 아들의 죽음은 돌아갈 장소를 지워버렸고 어춘심의 죽음은 돌아가야할 자신을 부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무엇이 어떻게되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신을 향한 친절도, 자기를 위한 따스한 온기도, 그러나 정작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니 의미가 없다. 유령은 유령답게 살아서 남긴 원한과 미련을 쫓아 무의미한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자신을 닮아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는대로 내보이던 박수하마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박수하에 의해 죽고 모든 것을 끝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작가의 묘사가 섬세하다. 그리고 그것을 연기하는 정웅인의 표정과 눈빛이 소름끼치도록 치밀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자신이 어색하다. 이제와서 양심을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너무 멀리 왔다. 오히려 가게주인이 자기에게 베푸는 선의와 호의에 대해 그 고마운 마음을 살의로 바꾸어 드러내고 만다. 친절하게 묻기까지 한다. 가게주인이 동의했다. 순수한 살의였을 것이다.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게주인의 친절이 그를 불편케 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못내 쓰리고 아프다. 흔치않은 또다른 형태의 절대악일 것이다. 동정할만한 여지는 있지만 용서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강력하다.

 

역시나 박수하의 기억상실 역시 그다지 중요한 설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박수하의 기억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돌아온다. 별다른 사건이나 고비 없이 박수하는 기억과 함께 자신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마저 다시 돌려받고 만다. 그러나 이미 드라마의 중심은 장혜성과 서도연, 그리고 차관우다. 아니 그래서 박수하는 어른이 된다. 고등학생에서 어른이 되어 장혜성과 만난다. 법정드라마에서 변호사를 돕는 조력자보다 자신의 의뢰의 대상이 되어 소비되는 것도 흥미로운 변화일 것이다. 장혜성이 박수하에게 이성에 대한 감정을 느끼듯 박수하의 능력은 범위 안에서 고정된다. 이 부분 만큼은 멜로가 된다. 이유며 목적이다.

 

민준국이 돌아온다. 박수하도 돌아왔다. 민준국은 여전히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수하 역시 원래의 능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딪히기 전에 먼저 검찰인 서도연이 민준국의 뒤를 쫓고 있을 것이다. 민준국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 순간 박수하에게도 장혜성 뿐이다. 민준국이 법정에 설 일은 없다. 변호사가 없다. 장혜성이 서도연의 편에서 민준국과 싸워야 할 이유도 알 수 없다. 장르가 바뀌려 한다. 박수하와 장혜성의 관계는 벌써 깊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과 함께 보이고 말았다. 지나치게 어른이었던 장혜성과 박수하의 격차가 좁혀진다. 민준국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한 편으로 경직되어가던 긴장이 하나씩 풀어져가고 있다.

 

11년 전 민준국의 재판에서 증언한 것을 장혜성이 그토록 후회하는 이유가 나왔다. 디테일의 부족이다. 이미 그로 인해 장혜성의 어머니가 죽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장혜성이 증언만 하지 않았다면 장혜성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바로 정의감이다. 민준국을 유죄로 만들기 위해 장혜성은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이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다시 서대석(정동환 분)에 의해 그것은 고스란히 장혜성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만다. 거짓말이 아니다. 공포탄이다. 어찌되었거나 자신의 진실 역시 그렇게 오해되고 폄하된다. 억울하고 화가 난다. 서도연과의 사이에 남은 마지막 숙제다. 가장 싫은 것은 그런 자신이다.

 

한 편으로 25년 전 신상덕이 담당했던 황달중(김병옥 분) 사건의 의외의 진실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치료가 불가능할 병으로 인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황달중이 병원을 찾던 중 우연히 한 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황달중과 여자의 놀라는 표정과 카메라에 잡힌 여자의 장갑낀 손은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진실을 따로 있었다. 황달중의 이름에 동요하는 서대석 역시 그와 무관할 수 없다. 서도연의 아버지 서대석은 지금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황달중이 유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장혜성과 오버랩된다. 서대석과 장혜성이 다시 진실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다. 서대석은 과거의 자신과 만난다. 진실은 어쩌면 반전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민준국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이대로 끝났으면 싶었을 것이다. 증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같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수하를 붙잡아준 것은 다름아닌 장혜성이었다. 그러나 민준국은 붙잡을 자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장혜성의 절대적 믿음 속에 박수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민준국도 돌아가야 한다. 비극을 예감한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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