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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2 - 마약보다 지독한 음악, 양동근의 '둥지'에 취하다!

까칠부 2013. 9. 22. 07:12

1980년대는 조용필의 시대였다. 1990년대에는 서태지와 HOT가 있었다. 시대의 아이돌이란 곧 혁신을 뜻할 것이다. 지난 기성의 문화를 뒤집고 보다 젊은 새로운 문화를 뿌리내린다. 젊은 세대는 자신들에 어울리는 새로운 문화를 요구한다. 조용필이 그랬고, 서태지가 그랬으며, 1960년대와 70년대 남진이 그랬다.

 

해방 이후 미군과 함께 들어온 보다 세련된 서구의 문화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속히 기성의 문화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다 정교하고 보다 세련된 스케일과 양식을 갖춘 서구의 음악은 특히 새로운 문화에 민감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음악인들에게 있어서도 화두였다. 어떻게 하면 서구의 기술과 감성을 우리의 음악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현인이 있었고, 배호가 있었으며, 최희준이 있었다. 박시춘이 있었다. 그리고 남진이 있었다.

 

잘생기고 노래도 잘했다. 하지만 그보다 파격이 있었다. 남진 자신도 방송에서 말하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남진과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대한민국의 주류대중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바른 자세로 기껏해야 손짓이나 더해가며 오로지 노래에만 집중하던 이전의 선배가수들과는 달리 남진은 무대에서 신명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기는 남진 자신부터가 새로운 해외의 문화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의 수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트로트같은 구닥다리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렇게 싫었었다고 언젠가 말하기도 했었다.

 

노래부터가 새로웠다. 팝의 세련된 기법과 양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한결 세련되면서도 흥겨운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파격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신명나는 몸짓이 있었다. 음악이란 즐거운 것이며 직접 몸을 움직이며 즐기는 것이다. 원래는 가요를 부르면서도 춤을 추었다. 전통의 민요를 부르면서도 춤을 추었다. 현대의 대중음악은 보다 더 대중에 가까운 것이다.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지금도 남진의 무대에는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남진이 있었기에 김추자도 나올 수 있었다. 인순이가 있었다. 인순이의 무대에 김완선이 함께 오르고 있었다. 인순이의 뒤에서 춤을 추던 두 젊은이가 서태지와 아이들이 되어 다시 시대를 바꾸고 있었다. 물론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더 이상 기성의 대중가요로는 안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무대가 필요했다. 새로운 스타를 필요로 했다. 그것이 남진이었다. 시대의 아이돌이었다. 영원한 '오빠'였다.

 

굳이 트로트라 정의하지만 남진의 창법은 트로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차라리 팝을 부를 때 남진의 목소리는 더 빛을 발한다. 이제까지 없었던 파격적인 춤사위에, 장르를 넘어선 호쾌한 목소리, 무엇보다 남진 자신이 갖는 마초적인 매력이 있었다. 남자였다. 원초적인 욕망의 대상이었다. 오빠란 동경의 대상이며 첫사랑의 상대이기도 하다. 70년대를 넘어서 80년대로 향하고 있었다. 전통사회는 빠르게 서구화되어가고 있었다. 젊은 세대가 주인이 된다. 이제는 젊지 않음에도 그는 여전히 젊기만 한 '오빠'인 것이다. 남진인 것이다.

 

하필 짜기라도 한 듯 1부에 비해 2부 출연진의 면면이 화려한 정도를 넘어섰다. 역대최고득점의 정동하와 1점 차이로 2위에 있는 JK김동욱, 명품목소리 조장혁에, 국악과 팝핀의 아트커플 박애리와 팝핀현준, 그리고 첫출연이지만 너무나 기대되는 양동근이 있었다. 아역배우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힙합아티스트로서 더 익숙하다. 아니나 다를까 뼛속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전율의 무대들의 연속이었다. 음악이란 어쩌면 마약이다. 멀쩡히 인간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고,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록이 추구하는 사이케델릭이란 약물중독에서 오는 환각을 뜻하는 말이었다. 약물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서 다른 세상 다른 감각을 경험한다.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자신을 맞닥뜨리게 된다. 학습되고 강요된 이성이 아닌 본능과 직관의 세계에 존재하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진실한 자신의 욕망이고 감각일 것이다. 하필 '둥지'였다. 지난날의 아픔은 잊어버리라는 가사였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게 맡기라 말하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군무에서 느낀 것은 '드럭'이라는 단어였다. '트랜스'도 있었다. 음악에 몸을 맡기는 사이 어느새 관객 역시 현실을 잊어간다. 차라리 종교에 가까웠다. 하기는 누군가는 종교를 인민의 마약이라 정의했을 것이다. 종교의 교주였다. 아무리 인간이 노래를 잘해도 신과 직접 소통하는 사제의 말씀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인간의 것이되 인간의 것이 아닌 언어로 인간이 닿지 못하는 심연을 들려준다. 그것은 가장 솔직한 표면의 인간의 감정이다. 양동근은 아주 독한 마약이었다. 제대로 관객을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취해버리고 말았다.

 

양동근이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강력한 환각을 보여주었다면 JK김동욱과 조장혁은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자신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빠른 리듬에 트위스트를 추며 여자를 이야기하고, 목소리까지 흐느적거리며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한다. 선명하던 세상이 흐려지며, 세상과 만나는 자신의 감각마저 흔들리고 만다. 아픔마저 잊게 된다. 아픈줄도 모르고 마음껏 소리친다. 술이란 해방이다. 비록 깨어난 다음날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아도 그 순간의 해방감을 잊지 못해 사람은 술을 마신다. 조장혁은 더구나 춤을 처음 추어 보았단다. 술에 취하면 못할 짓이 없다.

 

박애리와 팝핀현준은 추억에 취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쫓아 과거로 회귀하며 어느새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에 휩쓸리게 된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안타까웠던, 그래서 그립고, 아쉽고, 안타까운, 미안하고 죄스러운 감정들이 자기 안에서 뒤섞인다. 그리고 마침내 한 마디 내뱉게 되는 '사랑해'. 그 모든 감정들을 아우르는 한 단어가 바로 '사랑'일 것이다. 다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꽃을 품에 넣는 퍼포먼스는 그것을 의미하고 있을 게다. 지금을 살아간다. 현실을 살아간다. 추억은 함께한다. 사랑도 함께한다. '어머니'.

 

정동하는 슬픔에 취했다. 울고 있었다. 통곡하고 있었다.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눈물조차 안으로 삼켜야 했던 당시 남자들의 비감을 담아내고 있었다면 정동하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도 소리내어 울 수도 있는 현대 남성들의 솔직한 감정을 들려주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자기 이야기인 양 들려주게 된다. 어설픈 위로가 아닌 진실한 자신의 감정이다. 슬픔에 취하고 슬픈 자신에 취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당사자라기보다는 제 3자같다.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자신의 울음에 자신이 위로받는다. 정동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감정이 너무 깨끗하다. 순수한 소년과도 같다.

 

종교는 인민의 마약이다. 예술은 인간의 마약이다. 슬퍼서 노래를 듣는다. 힘들어서 노래를 부른다. 기뻐서도 노래를 부른다. 음악으로 슬픔을 잊는다. 음악에서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기도 한다. 기쁨은 더 커진다.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잊고 있던 감정들을 되새기기도 한다. 때로 더욱 선명하게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너무 시리도록 선명해서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더욱 격렬한 감정이 차라리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한다. 차이라면 마약에 중독되면 몸과 정신이 황폐해지지만, 예술에 중독되면 주머니만 조금 빈곤해질 뿐이라는 것이다. 마음과 정신은 풍요로워진다. 인간은 현실에 살지만 살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추석특집에 어울리는 전설이었다. 아니 오히려 넘쳤다. 2주의 편성으로도 남진의 수많은 히트곡들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남진이 갖는 의미도 이제는 너무 멀다 보니 많이 희미해졌다. 최초라는 말에 주목한다. 많은 점에서 그는 최초였다. 무대에서 그는 언제나 새롭다. '대중'가수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딴따라'다. 항상 가깝고 친근하다. 건재함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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