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주인집에 위기가 닥쳤다. 노비 가운데 나서는 이가 있다.
"저의 아이와 주인어른의 아이를 바꾸겠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다. 한 아이의 아비다. 그런데 태연히 자신의 아이를 주인의 아이와 바꾸려 한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어째서?
인간에게는 동경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몹쓸 본능이 있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더 크고 화려한 것을 꿈꾸게 된다. 더 멋지고 대단한 것들을 기대한다. 지금보다 더 가치있는 자신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게 여긴다. 투사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의 자신보다 더 가치있는 누군가가 되어 있다.
비천한 노비의 신분이다. 고작해야 노비의 아비이고 자식이다. 주인은 자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다. 고작해야 노비의 아비이고 자식이지만 고귀한 주인의 아들을 살리는 보다 가치있는 노비의 아비이고 자식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주인이 아닌 자신을 위한 희생이다. 자식을 위한 희생이다. 설사 죽더라도 죽음이 값없지는 않다. 자못 결연하기조차 하다.
노비들이 모여서 서로의 주인에 대해 비교하기 시작한다. 내 주인의 벼슬이 어디까지 올랐다느니, 내 주인의 명성이 어떻다느니, 내 주인의 조상이 누구라느니. 근대 이후 천민에게도 성을 가지도록 했을 때 일본이나 우리나 노비들이 가장 선호했던 것이 바로 자기 주인의 성씨였다. 김씨 집안의 노비들은 김씨가 되었다. 박씨 집안의 노비들은 박씨가 되었다. 본관까지 따라쓰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주인과 동일시한다. 비록 몸은 비천한 노비이지만 주인을 통해 자신은 보다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
일제강점기 민족개조론을 내세운 일부 친일파들이 있었다. 일본처럼 되고 싶다.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일본을 동경했다. 일본이야 말로 조선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다. 일본이 곧 조선이었다. 일본인의 말을 쓰고, 일본인의 옷을 입고, 일본인의 문화를 누리며, 일본인 자신이 된다. 그것이 곧 조선의 영광이다. 우습게도 그들은 민족주의자였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그렇게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동조하고 있었다. 차라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을 일본화하려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의도는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은혜와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을 가져야 한다. 힘있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를 동경하게 된다. 모방하려 한다. 그리고 끝내는 동일시한다. 좌파 가운데는 그래서 한국인이기보다 유럽이기를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말끝마다 유럽이다. 입만 열면 유럽의 어느 나라가 등장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힘이고 가치다.
일제강점기를 긍정한다? 결국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해 아주 작은 비판이라도 해서는 안된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아주 문제있는 행동들이다. 독재를 긍정한다. 독재의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독재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일본인이 된다. 미국인이 된다. 독재자가 된다. 최소한 지금의 자신보다는 훨씬 낫다.
진중권이 옳은 말을 했다. 힘을 추구하다 보면 보다 강한 힘을 만나 굴종하게 된다. 힘을 추구하게 되면 보다 강한 힘을 만나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의 민족주의다. 미국을 위하는 것이 곧 한국을 위하는 것이다. 일본인을 이해하는 것이 곧 한국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독재자를 용납하는 것이 자신을 용납하는 것이다. 그들이 우파라 불리는 이유다. 민족주의는 우파의 가치이므로.
새삼 교과서 논란에 대해 놀라거나 어이없어 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다. 어쩌면 이 사회의 본질일 것이다. 자기의 역사를 드라마로 만들면서도 자기의 역사에 만족하지 못해서 다른 누군가의 역사를 기웃거리게 된다. 철저한 고증보다는 무언가 있어 보이는 남의 역사를 탐낸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환단고기'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비루하다.
그렇다고 마냥 다른 민족과 다른 민족의 문화, 혹은 가치를 배척하기만 할 것인가. 그것도 비루한 짓거리이기는 마찬가지다. 말했듯 본능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면 탐욕스럽게 받아들인다. 안되면 빼앗아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 다만 중심을 갖는다. 그것은 나다. 내가 그러는 것이다.
어째서 우파인데 다른 민족을 추구하는가? 어떻게 우파가 다른 국가를 추구하려 하는가? 그래서다. 그들이 민족주의자인 이유다.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의 본능인 셈이다. 그저 본능에 이끌리는 저열함이다. 한심한 일이다. 한국사회의 현주소일 것이다. 그렇게 이해한다. 재미있다.
'문화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와 창작 - 역사가 장난이냐? (0) | 2013.10.01 |
---|---|
SBS 스페셜 - 4대강... (0) | 2013.09.30 |
인터넷에 극우가 극성인 이유... (0) | 2013.09.22 |
어설픈 평론의 비극, 가엾은 군상들에 대해... (0) | 2013.09.16 |
야만적인 한국사회, 갑을문화의 기원... (0) | 2013.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