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歷은 기록이다. 사史는 기술이다. 과거의 사실이며 현재의 이해다. 역사는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사실만을 역사라 일컫지 않으며 해석만을 두고 역사라 부르지도 않는다. 과거의 사실들에 어떠한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고 재구성할 때 그것을 다시 흔히 관觀이라 부른다. 꿰뚫는다는 의미다.
내가 역사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석의 문제라?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역사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그 해석이 무엇에 기초한 해석인가 하는 것이다. 기록이 없는 기술이란 의미가 없다. 기록과 상관없는 기술을 두고 신화라 부른다. 사실과는 상관없는 현재의 입장과 바람에 근거한 서사를 일컫는다. 그리고 그나마 기술조차 전제하지 않는 의미를 두고 망상이라 부른다. 단지 내가 그렇게 믿는 것이다.
역사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사료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된다. 1차사료와 2차사료와 3차사료, 다양한 사료를 검증하고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보다 적확한 과거의 사실들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엄밀한 역사적 사실 위에 해석을 더하는 것이다. 매우 조심스럽고 힘든 작업이다. 그리고 그 결과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기준 - 즉 관이 생겨난다.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역사관이 생기고, 다시 역사관을 통해 역사를 하나의 유기체로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해석의 문제라? 역사관의 문제라?
사료비판에 대한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다. 사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조차 결여되어 있다. 필요하면 만들어서라도 더한다. 불필요하면 있는 것도 버린다. 이건 소설이다. 망상이다. 그런 걸 역사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역사라 부른다. 도대체 이 나라의 역사는 어디까지 썩어버린 것일까? 역사유물의 가치까지 계량하여 멋대로 파괴하고 버려버린다. 필요하면 역사고. 아니면 쓸데없는 구닥다리다. 하기는 그래서 역사를 부끄럽다 한다. 자랑스러우니 역사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좋으면 그만이다. 서로 통한다. 역사 우습게 여기기는. 대중이 그러하고, 그런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작가가 그러하고, 정치꾼들이 그러하다. 역사가 장난감이다. 실제의 역사를 가지고 그 해석의 여부를 가지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닌, 서로의 입장에 따라 역사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끌어맞추고 끼워맞춘다. 저열하고 졸렬하다. 서로라 하지만 한 쪽이 더 심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교과서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역사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아주 오래되었다. 차라리 판타지를 본다. 판타지는 망상이더라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 그래서 '해를 품은 달'은 좋았다. '대풍수'도 나쁘지 않았다. '뿌리깊은 나무'는 마지막으로 본 역사드라마였다. 이제는 교과서까지 그 모양이다. 웃고 만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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