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슬픔 - 이치현과 벗님들
하늘엔 흰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
무슨 생각에 걸어 왔는지
알 수 없어요
달리는 창가에 흐르는
눈꽃처럼 허무한 사랑에
눈을 감으면 그대 생각에
가슴이 시려워요
아 속삭이듯 다가와
나를 사랑한다고
아 헤어지며 하는 말
나를 잊으라고
거리에 흰눈이 쌓이고
내 가슴엔 사랑의 슬픔이
피어나지 못할 눈꽃이 되어
빈 가슴을 적시네
거리엔 흰눈이 쌓이고
내 가슴엔 사랑의 슬픔이
그대 가슴 안에 흩어져버린
눈꽃이 되었네요
가사 출처 : Daum뮤직
데뷔가 그러니까 1978년 대학가요제다. 심지어 이은하의 '아리송해' 음반에 코러스로 참여하고 있기도 했었다. 리더 이치현이 55년생이니까 유현상, 윤수일과 동년배다. 하지만 이들 밴드를 대표하는 히트곡 '사랑의 슬픔'은 1988년에 나왔다. 참으로 긴 무명시절이었다.
물론 이름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운타운과 소극장무대에서 그들은 소리없는 강자로써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몇 번이나 해체위기를 겪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방의 무대를 전전해야 했었다. 새로운 멤버들도 그렇게 만났다. 처음 이치현과 이현식의 듀엣에서, '라스트 찬스'출신의 드러머 이순남이 합류하며 3인조 밴드가 되었다가, 이치현만 남은 상태에서 김준기, 김용식, 오원철, 김태영의 4명이 합류하면서 5인조 밴드로 3집을 내놓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음악과 대중과의 사이에서 고민하던 3집은 결국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며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베이시스트 오원철이 나가고 다시 베이스 김경기와 기타 오세홍이 들어왔다. 거의 마지막이다시피 어렵게 이치현은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또다른 음반을 내놓았다. 이치현과 벗님들을 구원해 준 '추억의 밤'이 수록된 4집 '벗님들84'였다.
이미 밴드는 거의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활동도 없었고 수입도 없었다. 그런데 거의 몇 달만에 다운타운의 디스코텍을 중심으로 '추억의 밤'이 소리소문없이 인기를 모으며 밴드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마침 '들국화'를 필두로 밴드의 전성기가 시작되며 공연문화가 크게 일어나던 무렵이었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이치현과 벗님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6짐 '사랑의 슬픔'이 터져나왔다.
사실 '사랑의 슬픔'의 히트도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음반은 1986년 11월에 나왔는데, 가요톱텐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이듬해인 1987년 7월이었다. 거의 음원발매 하루만에 성패가 결정되는 요즘 시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일 것이다. 아니 당시에도 음반의 성패는 발매초기 몇 달 안에 결정되고 있었다. 이치현 자신의 말로는 다시 팀을 해체하고 다른 일을 찾아볼까 하던 무렵 거의 1년이 다되어서야 히트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어렵게 자신들의 최고 히트곡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음반판매량 80만장.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기록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독특한 음악을 들려주던 밴드였다. 록의 강렬한 사운드나 특유의 거친 반항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이름바 '가요'와 통하는 것이 많았다. 달착지근한 사랑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노래의 멜로디에도 뽕끼가 충만했다. 그런가 하면 드물게 라틴리듬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코러스는 이들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모였을 때 그것은 '도시적 세련됨'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치현의 목소리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잘생긴데다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이치현 자신이 산타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당시 유행하던 포크와 록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밤무대를 전전하며 대중이 원하는 '가요'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명의 시절마저 견뎌낸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마침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져가던 대중들은 도시에 어울리는 새로운 음악을 요구하고 있었다. 기성의 가요와 맞닿아 있으면서 라틴의 리듬과 나른한 서정미를 들려주던 이치현은 동시대의 어느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이 독이 되었던 것일까? 결국 3집부터 함께했던 동창 김준기와의 갈등이 문제가 되어 이치현과 벗님들은 이후 김준기가 주도하는 벗님들과 이치현과 벗님들로 나뉘어 활동하게 된다. 이때 이치현과 벗님들의 이름으로 내놓은 6집의 수록곡이 제목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집시여인'. 이치현은 이 노래에 대해 지금도 불만이 많다. 성급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성공까지만 말한다.
아무튼 음반을 발매하고 무려 몇 달을, 소극장과 밤무대를 전전하며 해체를 고민한다. 별다른 홍보 없이도 소리소문없이 음악이 좋으면 대중이 알아서 찾아 들으며 늦게라도 히트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4집의 '추억속에'와 5집의 '사랑의 슬픔'. 어쩌면 이 또한 낭만일 것이다. 미디어와 기획사의 파워가 더 중요해진 지금은 오랜 전설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오디션의 이유를 이해한다.
90년대만 해도 음악만 좋으면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무명밴드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음악만 좋으면 먼저 나서서 찾아들었고, 그같은 대중의 선택으로 무명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제는 오디션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오디션이 대중의 선택을 중개한다. 지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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