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하다고 봐줬더니 어디 와서 행패야? 징그러워, 아주 징글징글해!"
대부분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싫어한다. 차마 손대기조차 끔찍하다. 그래서 툭 밀어넣는다. 손에 닿지 않게. 아니 아예 몸에 닿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 치워놓고 만족한다.
"이제 깨끗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안도훈(배수빈 분)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안도훈의 어머니 박계옥(양희경 분) 역시 마찬가지다. 주위에서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하나다. 세상에는 진실도 정의도 없다. 오로지 힘있는 자만이 그것을 말하고 지킬 수 있을 뿐이다.
고단한 것이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게을러지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눈에 보이는 것도 단지 눈에 보이지 않게만. 그리고 다음날이면 다시 아침일찍 고된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삶에 치여 지쳤을 때 진실이니 정의니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인가. 사랑따위 무슨 대수인가.
그나마 강유정(황정음 분)은 아버지 강우칠(강남길 분)의 애틋한 보살핌 속에 자라왔었다. 아버지라고 하는 든든한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사랑을 믿으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안도훈의 어린시절은 불의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짓눌려 있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야 했고 평생을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했었다. 검사가 되어 억울한 이들을 돌보겠다는 다짐은 그같은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미 너무 버겁고 힘들다.
그냥 잠시 눈만 돌리면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더 이상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썩은 냄새도 익숙해지면 괜찮아진다. 더럽다며 청소한다고 부산을 떨 때 오히려 그것이 더 성가시고 귀찮기만 하다. 그만 내버려뒀으면. 조민혁(지성 분)을 향한 넋두리야 말로 안도훈의 진심을 들려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여자입니다. 그까짓 사랑때문에 지 인생도 포기하는..."
어쩌면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인가? 자기는 그럴 수 없다. 화가 난다.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다.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자괴감마저 느낀다. 모멸감마저 느끼게 된다. 정작 화나는 것은 자기 자신일 텐데, 그러나 그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고단함이 그 화를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만든다. 강유정만 아니라면. 강유정만 없다면. 어째서 그녀는 자신처럼 자기를 지키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그녀는 그토록 바보같은가.
모난돌이 정맞는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병법삼십육계에도 가치부전이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어리석다면 괜히 혼자 나서서 미친 사람이 되지 말고 그에 맞춰 바보가 되라. 처세술이라 부른다. 그런 점에서 안도훈의 행동운 모순되다. 그렇다면 안도훈 자신 역시 K그룹 법무팀에 몸담게 된 이상 철저히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어야 했을 것이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자신을 맞춰간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안도훈의 비극이었을 것이다. 신세연(이다희 분)을 사랑한다. 정확히 신세연이 상징하는 부와 권력, 이 사회의 기득권을 동경하고 추종한다. 그것은 애끓는 짝사랑과도 같다. 아무리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설사 그로 인해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도저히 보아 줄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하고 비루한 모습에조차 그는 그 사랑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사랑에는 질투가 따른다.
그것은 맹목적인 증오였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비굴한 원망이었다. 그대로 눈감고 귀막고 입다물고 아무것도 모른 척 죽은 듯이 살아가기에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남기고 왔다. 강유정의 존재는 그로 하여금 지금에 머물지 못하도록 그를 재촉하고 있었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란 안도훈처럼 후회와 미련에 쫓기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르게 무작정 앞만 보며 달려가고 만다.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속인다. 아니 그것은 진심이었다. 막다른 궁지로 내몰린 신세연에게 함께 떠나자 말한다. 안도훈과 함께 떠난다면 신세연은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세연은 안도훈에게 있어 가치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믿어 버린다. 신세연에게 불리할 수 있는 신아재단의 자료를 조민혁을 압박하기 위해 이용한 자신이.신세연의 말처럼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기의 손에 쥐고 싶다. 반복된 변명과 거짓말이 어느새 그것마저 사실로 여기도록 만든다. 그는 진심이 되어 있었을까?
강유정이 질타하는 그대로다. 명의만 강유정으로 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버지 안인환(강신일 분) 역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차를 운전하는 것은 안도훈이었다. 그러나 믿고 싶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믿고 싶었고, 아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속고 속이며 살아간다. 차라리 그것을 일깨우는 것을 원망하고 증오한다. 시끄럽다. 성가시다. 네가 뭐 그리 잘났는가. 잠든 채가 가장 편하다.
어쩔 수 없이 깨닫고 만다. 자기는 단지 조민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이룩한 K그룹의 후계자다. 강유정은 잊고 있었다. 안도훈의 연인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강우철에게도 그녀는 소중한 딸이었다. 아들 산이를 낳았을 때 사이의 엄마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강유정 자신이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가. 안도훈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안도훈을 위해 희생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소홀히 하고 만 것들에 대해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희생이란 그런 것이다. 조민혁을 위한 것이었다. 조민혁을 사랑하는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그것이 옳다. 그래야만 했었다. 그런데 바로 후회하게 된다. 조민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조민혁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조민혁 역시 그녀의 선택에 울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죄를 씌워 강유정을 자신의 손으로 죄인으로 만들어 감옥에 보내야 했던 당시의 안도훈의 입장을 떠올려보게 된다. 강유정을 사랑했던 안도훈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때 안도훈의 마음은 어땠을까? 조민혁은 떠나가면 그만이지만 안도훈은 그런 강유정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조금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떠나왔다. 자기 발로 그의 곁을 그렇게 떠나오고야 말았다. 그때도 그랬었다. 안도훈을 사랑해서였다. 안도훈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안도훈의 죄까지 쓰고 감옥까지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남은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힘들고 아픈데.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의 상실의 아픔이 과거의 기억에게로 쏟아진다. 반전이 터져나온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바다. 안도훈과 강유정의 아들 산이가 살아있었다. 안도훈과 강유정의 선택은 무엇인가. 그 시간 조민혁은 신세연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역시 만만치 않다. 조민혁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처음 출발점부터 다른 불공평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다. 가진 자가 승리하도록 모든 룰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 안도훈이 하지도 않은 횡령을 조작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미디어도 사법부도 더 잘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되어 있다. 조민혁은 그같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훈련을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왔다. 재벌에 비판적인 시민들과 함께하려 한다는 안도훈의 말에 조민혁이 비웃는 이유다. 그것이 안도훈이 그토록 우러르며 탐내던 것이다.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세연은 안도훈을 돌아보지 않는다.
신세연이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조민혁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조민혁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조민혁의 껍데기를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잃은 것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떠밀려 하게 된 결혼이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를 위한 도구였다. 자신의 결혼 또한 아버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다. 그렇게 길들여져 있다.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마저 느낀다. 조민혁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조민혁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자격을 잃었다. 그렇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무엇도 얻지 못하고 무엇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가 더 큰 상처를 입은 것 같다. 온갖 악의와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데 정작 가장 상처입은 것은 안도훈 자신인 것만 같다. 공허하다. 저릿할 정도로 허무가 느껴진다. 다른 아무것도 필요없이 그저 배수빈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작가가 의도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일관된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충실하게 안도훈 자신이 되어 있는 배수빈의 연기력은 탁월한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좋은 대본이 좋은 연기를 만들고, 좋은 연기가 좋은 드라마를 만든다. 시청자는 제작진에 의해 연출되고 편집된 영상을 본다.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아니 시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조민혁의 어머니가 떠난 이유다. 노름빚을 대신해 조민혁의 아버지 조한일(이덕화 분)과 살게 되었다.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나 결국 조한일의 아내로서 견디지 못하고 당시 조한일과 내연관계에 있던 홍인주(조미령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말았다. 반전이었다. 홍인주로 인해 조민혁의 어머니가 떠난 것이 아니었다. 조민혁의 어머니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홍인주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망쳤던 것이었다. 조민혁도 알았을 것이다. 단지 모르는 척 했을 뿐이다. K호텔을 지켜야 한다는 조한일의 말이 어쩐지 슬프게 들린다. 그렇게 믿고 산다. 사랑이 변했을 뿐이다.
신세연과 안도훈의 압박에도 조민혁은 강유정을 선택한다. 하지만 강유정에 대한 그의 진심 만큼이나 아들로써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 또한 진심이다. 홍인주와 조민혁 생모와의 관계 또한 반전이라면 반전일 것이다. 홍인주가 그토록 자기가 낳은 아들도 아닌 조민혁을 걱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안도훈의 계획은 신세연에게 그녀의 말처럼 껍데기뿐인 조민혁과의 결혼을 더욱 강하게 추진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조민혁의 반격은 안도훈을 함정으로 밀어넣는다. 너무 친절했던 탓에 강유정의 아들 산이 살아있는 것은 반전조차 아니게 되어 버렸다. 충분히 예상했다. 선택의 순간에 드라마는 결론을 내일로 미루고 만다. 화나게도.
아들의 잘못보다는 그것을 따져묻는 강유정이 싫다. 아들이 잘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그저 강유정이 와서 떠드는 것이 시끄럽다. 입만 다물면. 귀만 막으면. 찔끔하고 마는 것은 필자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강유정은 시끄럽다. 그래서 싫다. 무거운 이유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아프고 시리다. 익숙한 일상이다. 다르지 않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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