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80년대 중고딩들 교실에서는 - 아마 우리학교에서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 어느 락밴드를 좋아하느냐를 두고 꽤 심각하게 다투곤 했었다. 일단 국내락은 돌아볼 것도 없다는 해외파는 제끼고, 가장 세가 강했던 것이 백두산.
"풋내나는 자식들!"
이태원 클럽무대에서 갈고닦은, 더구나 기타리스트이던 김도균을 제외하고 모두 서른을 넘긴 베테랑으로 이루어져 있던 백두산의 연주는 사실 다른 밴드들과 차원을 달리했다. 아무리 3대 기타리스트고 뭐고 해도 대개가 20대 초반이다 보니 실력이나 경험이나 한춘근, 김창식, 나중에 들어온 김영진 등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당시 시나위의 리더였던 신대철의 나이가 지금 구하라 나이였다. 67년생인데 86년에 데뷔했으니. 김태원이 두 살 많았고, 김도균이 한 살인가 더 많았으니 박규리 나이다. 파릇파릇한 청춘들이었던 거다.
그러나 워낙 메탈씬의 문을 시나위가 열었기에 시나위 지지자들이 또 많았다. 나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는데, 내 또래들에게 신대철은 기타의 신이었다. 세계에서 신대철보다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물론 어린 치기였겠지만.
시나위 지지자들은 다른 밴드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양아치 자식들!"
이건 백두산 지지자들에 대한 것,
"그게 락이냐?"
"계집아이들 같이!"
이건 부활에 대한 것,
부활은 주로 지지층이 여자아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남자들은 일단 허세로도 부활에 대해서는 그닥이었다. 일단 데뷔곡 희야부터가 완전 가요였던 터라. 아마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타이틀로 내세웠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텐데,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나는 좀 뒤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한국 락사상 명곡 가운데 하나라 생각한다.
그럼 부활은 어땠느냐?
"허세쟁이들!"
"음악도 모르는 것들이..."
더구나 당시 우리학교에는 꽤 카리스마 넘치는 음악선생님이 계셔서. 음악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노래 말고도 가요도 제법 부르게 하고 했었는데, 이 선생님이 음악시간에 나누어준 악보 가운데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와 구창모의 "희나리" 그리고 부활의 "희야"가 있었다. 그게 또 부활 지지자들에게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당시 대세가 부활이 가장 수세일 수밖에 없었다. 하는 말도 딱 그렇지 않은가?
즉 가장 크고 극성맞은 것이 백두산, 그 다음이 시나위, 여자아이들을 포함한 부활이 가장 약하고... 대충 이런 순이었다 보면 되겠다. 하여튼 별 시답잖은 일들 가지고서도 서로 아웅다웅 꽤 시끄럽게 즐겁게 놀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락밴드를 좋아하는 만큼 또 자기도 밴드하겠다고 나서는 얼치기들도 당시에는 많았었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건 역시 기타, 집안 좀 되고 하면 기타 하나씩은 필수였다. 물론 실력은 되지 않으니 입으로 애드립. 어디에 기타 잘치는 녀석이 있네, 어디에 베이스 죽이는 녀석이 있네, 그러고 보면 그 녀석들 창법이라는 게 거의 유현상 아니면 임재범이었다. 굵게 깔거나 날카롭게 뽑아서. 그리고 그 가운데는 어디 밴드 쫓아다니던 녀석들이 있었다는데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87년 김태원이 대마초로 달려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태원이 달려가고, 백두산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한 마디로 공황이었다. 시나위마저 소리소문없이 활동을 중단하면서 그 자리를 H2O가 일부 대신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녀석들 입에서 락밴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당시 막 데뷔했던 이지연과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곧 이어 데뷔한 강수지...
그때부터 또 교실에서는 브레이크댄스의 붐이 돌았다. 아니 그 전부터였을 것이다. 해외 뮤직비디오에서 소개된 브레이크댄스에 매료되어 흉내내는 녀석들이 제법 있었는데, 락밴드가 사라지자 그들이 교실을 차지했다. 그리고 박남정, 소방차 등의 인기 댄스가수들의 춤을 흉내내며 인기를 모았다. 남자아이 치고 박남정과 소방차 춤 흉내 하나 못 내면 그것도 우스웠으니. 락씬의 종말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백두산, 시나위, 부활은 지금의 아이돌이었다.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노이즈가 그랬던 것처럼 80년대에도 이들 세 밴드는 아이들의 우상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로 지지하는 밴드를 따라 편갈라 싸우고, 누가 어쨌대더라, 누가 어땠다더라, 하여튼 별 말도 안되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이때 떠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라이브 한 번 찾아가 보지 못한 게 아쉬운데. 그러나 또 당시 우리집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던 때라 무리긴 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금도 나는 신대철의 낡은 기타를 보면 설렌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신대철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하면서부터 기억하는 것은 묵묵히 기타에만 몰두하는 모습과 그의 어깨에 걸린 칠이 다 벗겨진 낡은 기타였다. 지금이야 그가 세계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역시 당시 내게 세계최고의 기타리스트는 신대철이었던 터라. 어딜 감히 김태원과 김도균따위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아이돌이 있다. 물론 음악이 뛰어나서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욕망의 투사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 물론 그것은 음악적인 것이 아니기 쉽다. 그러나 화려하고 멋진 무대 위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원초적인 두근거림이라는 게 있었다. 거기에 끌리는 것이고 거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래서 락씬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졌던 것이다. 결국은 락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것이라. 김완선이었어도 좋았고, 이지연이었어도 좋았고, 소방차나 박남정이었어도 좋았고...
그래서 신대철도 인터뷰에서 그리 말한다.
"한국에서 락이 주류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도 한계라는 게 있었다."
어린 녀석들은 단지 이제까지 어른들이 듣던 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원했던 것이었다. 팝에 익숙해진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보다 신나고 강렬한 음악을. 아, 그러고 보면 김완선도 락커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음악은 대개 락커가 썼고, 락커가 연주했으며, 음악 자체가 락이기도 했었다. 단지 부르는 자신이 댄스가수였을 뿐. 아마 나중에라도 락커의 명예의 전당이 생기면 그녀의 이름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김완선 자신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도 락에 매료된 청춘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에 그렇게 락을 추종하던 어린 녀석들이 김완선과 이지연을 쫓고, 박남정과 소방차를 추종하고, 이내 서태지와 아이들에 넘어갔던 것이었다. 군대에서도 싸우더라. 서태지와 아이들이냐 듀스냐. 그리고 이어 나온 HOT가 본격적인 아이돌로서 팬덤시대를 열고, 젝스키스와 신화, GOD,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금은 동방신기, SS501, 빅뱅, 2PM, 소녀시대, 원더걸스, 2NE1, 카라가 그 역할을 하고 있겠지. 역시나 그 시대의 욕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 아이돌로서.
하긴 그러고 보면 당시 락밴드가 메이저무대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비즈니스적인 판단의 결과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메탈이 한창 붐을 이루는 것을 보고 어딘가 음반회사에서 컨텍을 해서 불과 사흘만에 찍어낸 앨범이 시나위 1집이었으니. 제대로 된 체계도 계획도 없이 몇몇 곡은 녹음하면서 써서 녹음했고, 심지어 임재범은 감기에 걸린 채였다. 그렇게 급조해 낸 앨범이 시나위 1집이었다. 부활은 그나마 시나위의 성공에 고무된 음반사와의 컨텍으로 그보다 더 짧은 이틀만에 녹음을 끝내고 있었고. 그조차도 너무 많이 쓴다고 김태원과 이승철은 매니저에게 맞고 그랬다던가? 곡 구성도 그래서 체계가 없이 중구난방이다. 몇몇 곡은 분명 훌륭하지만 앨범으로서는 그닥 듣고 싶지 않은, 하긴 그나마도 당시 만으로 19살이던 신대철과 21살이던 김태원이 있었기에 그만한 앨범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백두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유현상은 원래 솔로앨범을 낼 생각이었다. 나이도 이제 서른에 접어들고 클럽무대는 한계가 있었으니. 그런데 언더그러운드에서 이는 메탈씬의 붐을 보고 유현상은 생각을 바꾼다. 그 역시 제대로 된 락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김창식과 한춘근을 불러들이고, 이태원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아직 젊었던 김도균을 끌어들여 백두산 1집을 내게 되었던 것이었다. 다만 이 또한 워낙 급조된 앨범이라 유현상이 솔로로 내려 했던 가요들이 상당수 포함돼 뽕메탈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었다. 사실상 백두산의 제대로 된 앨범은 - 아니 시나위나 부활도 역시 2집에서야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된다. 1집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의 전권을 보장받았더 뒤로야.
녹음시설도 형편없어서 지금도 당시 노래들 듣고 있으면 동생이 그런다.
"카세트라디오로 녹음한 거야?"
요즘 어지간한 MP3로도 녹음해서 그런 음질 안 나온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돈이 된다니까 음반사들이 달려들어 급조해서 낸 앨범들이 당시 락밴드의 앨범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뒤이어 작은하늘이 나왔고 부활의 이지웅과 시나위의 임재범이 손을 잡고 외인부대도 나왔으며, 해외파로 특이하게 키보드가 기타파트를 대신했던 H2O도 미니앨범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당연히 더 이상 락이 돈이 안 되자, 상품성 높던 이승철의 걸프렌드마저 손무현과 윤상이라는 화려한 멤버에도 불구하고 앨범 하나 내지 못하고 해체되고 있었고.
음악적으로 어찌되었거나 대중음악이란 또한 비즈니스라. 비즈니스란 시장과 자본의 상호교감인 것이고. 뮤지션은 때로 그 사이에서 소모되곤 한다. 요즘 아이돌과 다른 점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쫓아 열정 하나로 언더그라운드를 구르며 실력을 키운 뮤지션들이 그를 통해 단지 메이저로 데뷔한 것이랄까? 그래서 또 각 밴드마다 개성도 강했다. 기획사나 음반사의 개성이 아닌 뮤지션의 개성이. 그래서 또 곧잘 팀들이 깨지고 했던 것이었고. 너무 개성들이 강해서.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는데, 결국은 같다는 거다. 김태원이 말했지. 음악은 모두 같은 거다. 5, 60년대의 트로트나, 70년대의 포크나, 80년대의 락이나, 90년대의 랩댄스와 지금의 아이돌까지. 결국은 말 그대로 아이돌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아이돌이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아이돌. 그 시대가 요구하고 소비했던 대상들. 그래서 그들에게는 또 그들이 살아왔던 시대가 있었다. 단지 지금은 조금 더 상업적이 되었을 뿐.
아마 앞으로도 대중의 요구가 달라지는만큼 아이돌 문화도 달라질 것이다. 또 모르지. 트로트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지도. 아니면 인디씬이 갑자기 주류무대로 올라와 아이돌이 될 수도 있고. 힙합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어떤 다른 장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리고 소비할 것이다. 그들의 시대와 욕망을. 그게 아이돌이니까.
아무튼 이제 와서 FT아일랜드나 씨엔블루 두고 락이네 아니네... 솔직히 그게 뭔 상관인가 싶다. 결국은 음악이란 그 시대의 요구다. 쇼비즈니스란 그 시대 대중의 요구고. 좋아서 락이라 들으면 락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정히 그런 게 싫다면 나처럼 아예 다른 음악을 찾아 들으면 된다.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며 즐기겠지. 그렇게 나누고 디스하는 것도 한 즐거움이기는 하겠지만.
새벽부터 옛날 락밴드들의 음악을 들었다. MP3라는 게 좋기는 좋더라. 예전 미처 구하지 못했던 음반이나, 이제는 버리거나 잃어버려서 듣지 못하게 된 음반까지도 클릭 몇 번으로 모두 들을 수 있으니. 역시 그리움이란...
참 우습기는 하다. 당시는 뭣한다고 그리 진지해졌던 것일까? 시나위면 어떻고 부활이면 어떻고 백두산이면 어떻고... 그러나 또 때로 그렇게 진지해지곤 하는 게 음악이고 아이돌이고 하니. 아마 20년 뒤에도 지금의 걸그룹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지 않을까?
"그때는 참 뭣한다고 카덕이네 소덕이네 티덕이네 나눠 싸웠었는지..."
그러나 그게 또 음악을 즐기는 즐거움이라는 거다. 그리고 시간은 그 모든 안 좋은 감정들조차도 채색하여 그리움으로 남기는 것이고. 음악이 좋다는 것은 그래서다. 음악을 듣는 그 그리움들이. 좋다. 아침부터.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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