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빅맨 - 동화,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까칠부 2014. 6. 18. 07:09

위악이 위선보다 당연히 힘들다. 위선은 선을 동경하는 것이다. 모두가 선이라 여기는 것을 스스로 따라가려는 것이다. 설득하기도 쉽고 납득하기도 쉽다. 하지만 위악은 선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신이 선이라 믿는 것을 거부하고 그를 배반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변명을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해야 한다. 그리고 설득당해야 한다.


하기는 차동석(최다니엘 분)에게도 아직 순수라는 것이 남아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선이라 여기는 것을 선이라 믿고, 모두가 정의라 말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선이 선이 아니고, 정의가 정의가 아니다. 당장 아버지 강성욱(엄효섭 분)이 그동안 해 온 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지금껏 믿어온 선과 정의를 부정하거나. 동생 강진아(정소민 분)는 전자였었다.


저들과 자신은 다르다. 마지막 변명에서도 그는 그렇게 말한다. 


"자신과 김지혁(강지환 분)은 태어난 세상이 다르다. 자신은 단지 자신이 태어난 세상이 원하는 길을 갔을 뿐이다."


자신의 선은 저들의 선과 다르다. 자신의 정의 역시 저들의 정의와 다르다.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으니까. 저들과 자신은 다른 존재니까. 끊임없이 강동석 자신을 향해 되뇌던 주문과 같은 것이다. 질투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 데 대한 분노일 수 있다. 자신은 알면서도 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그것을 김지혁은 거침없이 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강동석이 소미라(이다희 분)에게 집착한 것도 어쩌면 그녀야 말로 아직 순수하던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만은 분명 진심이다. 오로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진심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그래서 실패했다. 자신의 정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옳다는, 자신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이 부족했다. 끊임없이 흔들렸으며 그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아야 했다. 같은 재벌 2세인데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문명호(이해우 분)와 그래서 비교된다. 자신이 옳다는 증명을 위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현성유통의 경영권을 노리다가 현성에너지마저 김지혁에게 넘겨주게 된다.


개가 주인을 무는 것은 주인이 개를 물려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충성스런 개라도 주인이 자신을 죽이려 하면 당연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 주인의 폭력이 개에게 충성심을 넘어선 공포로 각인될 때 개는 주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하게 된다. 하물며 개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지만 사람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배신한다. 더구나 도상호(한상진 분)는 일신의 출세와 영화를 위해 현성일가의 온갖 불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마저 서슴지 않고 앞장서서 도와온 인물이었다. 현성일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사람이 아니었다.


변명일 뿐이다. 현성일가의 '개'로 죽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죽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었다. 그동안의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 가더라도 최소한 도상호 자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 그로 인해 강동석은 물론 강성욱까지 함께 감옥에 들어간다면 더 이상 자신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김지혁을 죽이려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미리 파놓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지금에야 양심을 되찾은 척 자신마저 속이면서. 쓸모가 다한 조범식을 죽이라 시키면서 언젠가 자신 또한 그런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괜히 강진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게 만든 것이었다. 어차피 그동안 해 온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었노라며 자신에게 변명하며 도망칠 구멍을 파놓았을 터였다. 양심의 구멍이었다.


사실 판타지다. 드라마에서야 김지혁 개인과 현성일가 개인의 대결로 단순화시켜 표현한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란 그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경우가 더 많다. 막바지였을 것이다. 더 이상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여러 주체들과 협상과 거래를 통해 설득하고 납득시킨다. 현상일가를 고립시키고 자신을 인정하게 만든다. 하기는 그 자체가 협잡이다. 정당하게 기업경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충분한 힘을 만들기보다, 강동석의 실수를 틈타 아예 현성에너지의 경영권 자체를 빼앗아 버린다. 대주주인 팬코리아를 설득하는 과정 또한 생략되어 있었다. 그들과 어떤 거래를 통해 어떤 이익을 주기로 하고 위임장을 받아냈는가. 거기까지 들어가면 김지혁의 경영권 탈취는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


미니시리즈라는 한계일 것이다. 더구나 김지혁과 강동석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다. 김지혁이 강성욱의 아들이 되어 있던 시절도 너무 길었다. 필요하기도 했다. 김지혁의 성공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주변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그 결과 정작 경영인으로서의 김지혁을 그려내는데는 소홀하고 말았다. 현성유통을 살린 아이디어 역시 구체적인 내용은 배제한 채 간략한 이미지로만 끝내고 만다. 강동석이 김지혁에게 경영으로 승부를 걸어오지 않으니 그를 맞받아치는 방법도 경영 이외의 것이다. 결국은 김지혁의 말과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오로지 경영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찌되었거나 현성일가의 아들이었었다. 강성욱의 아들 강지혁으로 처음 현성유통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맺은 인연들이 김지혁을 현성유통의 사장까지 만들었다. 강동석이 저지른 실수들을 비집고 현성에너지까지 가지게 되었다. 정당한 경영이나 기술개발보다 인맥과 인정이 더 중요하다. 그를 이용한 협잡과 편법, 심지어 불법까지도 요긴한 수단이 된다. 단지 그 마지막 승자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던 김지혁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일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아이디어만 가지고 성공을 거두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기업과 연관되어야 작은 기회라도 생긴다. 성공의 법칙이다.


나머지는 그냥 스쳐지나간다. 현실감도 없고 의미도 없다. 마지막에 김지혁이 꿈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기대했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오래된 동화의 흔한 관용구 같았다. 어차피 김지혁과 부딪혔던 현실의 모순이라는 것도 현성일가가 전부였다. 현성일가라는 괴물을 물리치고 이제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 일만 남았다. 모두가 행복해지고 모두가 좋아진다. 그래서 공허하다. 김지혁의 마지막 연설은 단지 사족에 불과했다. 그는 단지 현성일가에 승리하고 현성에너지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것이 드라마의 전부다.


기업드라마라기에는 기업이야기가 부족하고, 로맨스라기에는 김지혁과 소미라, 강동석, 강진아의 사랑이야기가 빈약하다. 복수물이라 하기에도 마지막에만 급했을 뿐이다. 복수가 가지는 치열함과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란 김지혁 자신의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결국 지금도 동화가 읽히는 이유다. 사람들은 때로 꿈을 꾼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일들을 꿈에서라도 이루려 한다.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름다운 것만으로 족하다. 의외로 세상일이란 매우 단순하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김지혁의 좌충우돌과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욕망과 감정들이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사회의 모순이고 부조리이면서 철저히 시청자 자신을 위한 우화가 되었다. 마침내 김지혁은 승리한다. 현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과 싸워 승리하고 두려움의 대상이던 현성에너지의 정점에 선다. 그리고 모두는 행복해졌다. 꿈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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