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지휘관을 가리키는 단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용맹이 빼어나기에 용장이다. 지략이 남다르기에 지장이다. 인품이 훌륭하면 덕장이다. 결국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명장이다. 그러면 그 명장의 조건은 무엇일까?
믿고 맡길 수 있다. 믿고 따를 수 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살지 못하더라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가치있게 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상사는 아무리 무례하고 무리한 요구라 할지라도 기꺼이 들어주려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하들 역시 어떤 무모한 지시와 명령에도 기꺼이 자신의 편리와 안전마저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목숨까지 내놓는다.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이라면 지금의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지난주에도 이미 지적한 바 있는 최전무(이경영 분)의 오판이며 오상식(이성민 분) 차장의 실수였다. 최전무가 지시한 일을 하면서 정작 오상식 차장은 최전무를 전혀 믿지 못하고 있었다. 최전무에 대한 불신이 일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팀장인 오차장의 불안은 곧 팀원의 동요로 이어지고 말았다. 더 오랫동안 회사일을 해왔고, 따라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해 온 각각 대리와 과장인 김동식(김대명 분)과 천관웅(박해준 분)마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물며 이제 갓 회사에 들어온지 1년 남짓한 신입사원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일을 맡아서는 안되었다. 일단 일을 맡기로 했다면 어떻게든 상대를 믿으려는 노력 정도는 보여주었어야 옳다. 최소한 그것을 주위에서 알 정도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위험할 수 있는 일을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모습 또한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태도였다. 하기는 그래서 최전무 역시 꾸준히 오차장과 영업 3팀과의 거리를 좁히려 시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차장은 최전무를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방식을 부정한다. 그런데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최전무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오차장과 영업 3팀은 사업을 원래대로 진행하기 위한 노력을 보이게 된다. 그나마도 끊임없이 최전무를 의심하며 확인하려 한다. 최전무의 방식을 부정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한다. 아마 최전무가 본사 감사팀으로부터 조사받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사업이 원래의 의도대로 원활하게 진행되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모든 합의가 끝난 상황인데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내용을 바꾸려 한다면 꽌시 뿐만 아니라 상대의 멘즈까지 건드릴 위험이 있다. 사업파트너로서 자신의 체면을 훼손했다. 최전무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한, 장차 회사에도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사업이었다. 마지막에 오차장과 영업 3팀에게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철학하지 마라. 팀장노릇하지 마라. 최전무 역시 오차장을 완전히 믿었다면 굳이 장그래까지 함께 술자리에 불러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하니까 생각이 많아진다. 중국지사의 석대라기 최전무와 그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상사에게 보고하고, 그 보고가 본사까지 올라가게 된 것도 결국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불안하니까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니 의심까지 덩달아 커진다. 석대리에게 믿음을 돌려주기에는 오차장의 말이 갖는 무게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오차장을 믿었기에 오차장이 의심하는 사업을 같이 의심했고, 오차장을 믿지 못했기에 오차장이 믿지 못하는 사업을 다시 의심했다. 그냥 시키는 일이나 잘하라. 그래서 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오차장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성대리(태인호 분)와 같은 타입이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조직에도 피해를 주고 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장 그동안 당한 일이 있기에 한석률(변요한 분)은 성대리를 믿지 못하고 그가 지시한 업무들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성대리를 의심하고, 감시하고, 심지어 회사가 끝난 뒤까지 성대리의 뒤를 미행한다. 당장 자신이 보기에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지시라 여겨지더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모두를 위한 일일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굳이 고민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대로만 해도 전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합리한 권위가 지배하는 조직은 그래서 낭비가 많다. 오차장처럼 한석률도 성대리의 진짜 의도를 의심하느라 정작 일에는 그다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책임도 권리다. 책임질만한 행동을 했을 때 책임도 물을 수 있다. 손발이 움직였다고 손과 발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손도, 발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 머리가 시키는대로 움직여야 한다. 장그래(임시완 분)는 손도 발도 아닌 그 말단의 손가락 마디일 것이다. 그나마 손이 시키지 않으면 손가락은 움직일 수 없다. 일이 이렇게까지 번지게 된 것도 그저 시키는대로 움직여야 할 손가락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오차장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커졌다. 그 책임 역시 오차장에게 묻는다. 어느새 안영이(강소라 분)는 자신의 직속인 하대리(전석호 분)의 여성취향마저 따라가려 한다. 오차장이 장그래를 잘못 가르쳤다. 신입사원이 그렇게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원작에서보다 더 비참하다. 그나마 원작에서 오차장은 이미 갈 곳을 정한 뒤 용퇴하듯 회사를 떠난다. 회사에서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같지만 그럼에도 회사를 나가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회사가 원하니 떠난다. 회사가 더 이상 오상식 차장을 원하지 않으니 스스로 떠나간다. 노골적으로 회사에서 나가주기를 바라는 말을 들었다. 더 이상 회사에서 버티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 장그래에게 버티기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었기에. 장그래의 잘못이지만 그조차 자신의 책임이다. 장그래는 일개 계약직 신입사원에 불과하고 오차장은 차장이고 그의 팀장이니까. 지난 십수년간 회사에 막대한 이익과 더불어 자신을 전무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자기의 방식에 대해 회사로부터 전면부정당하고 좌천까지 당하는 최전무의 입장과 오버랩된다. 임원조차 회사를 위해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때만 유용한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부정당하고 버려질 수 있다.
어쨌거나 그래서 생기는 불협화음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직장을 잃게 되면 당장 수입이 생길 때까지 아낄 것을 고민하지, 아직 살 수 있을 때 직원할인으로 싸게 사둘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당장 회사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고, 그나마 실업급여까지 끊기고 나면 더 이상 수입이 사라지고 만다. 재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대기업 차장이라면 자리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당장 확정된 자리는 아니다. 회사로부터 퇴직을 강요받는 오차장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장면에서마저 원작을 살리느라 생기는 미묘한 엇갈림일 것이다.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고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최전무에게도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서로 다르지만 결국 회사와 모두를 위한 그만의 최선이었다. 한순간에 부정당한다. 결국 끝까지 두 사람은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 다르지만 같다. 악역이라기보다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이 멋지다. 드디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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