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음악이 소중하던 때...

까칠부 2010. 2. 3. 10:22

어려서 우리집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넉넉하다기보다는 학교가기가 때로 꺼려질 정도였었다. 당연히 음악을 들을 환경이 안 돼서, 아마 처음으로 내가 접한 기계가 건전지 14개 들어가던 거의 미니오디오만한 라디오였었다. 그래도 그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음악이라는 것을 듣기 시작했을 때, 그러나 라디오는 수명이 다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낡은 흑백텔레비전이 그 전부이다시피했었다. 그런 때 우연히 길에서 누가 버린 것을 주워 고쳐서 쓰기 시작한 내 카세트라디오. 결국 공부 않는다고 아버지가 집어다 던져서 아예 못쓰게 되어 버렸지만 중학교 때, 그리고 고등학교 때, 나는 그것으로 음악을 들었었다.

 

아마 4시부터 어디선가 가요프로그램을 했을 테고, 6시부터는 흘러간 트로트를 틀어주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8시부터 KBS AM에서 하던 가위바위보를, 10시부터는 아직 표준 FM이 시작되기 전 MBC AM에서 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리고 또 두 시부터는 팝을 틀어주던 프로그램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 이제 기억났다. 그 카세트라디오의 또 하나 문제. FM이 안됐다. 참 슬픈 일이지만...

 

뻔한 형편에 카세트테이프라고 자주 사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 달에 하나, 길면 두 달에 하나, 주머니 털어 테이프 하나 사고 나면 그야말로 테이프 늘어지도록 들었었다. 그래서 테이프 사러 가면 항상 고민이었다. 이걸 살까, 아니면 저걸 살까, 하나를 사면 다른 건 살 수 없으니. 쓸데없는 잡지식이 는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테이프 살 돈도 없는데 음악잡지 살 돈이 있기야 했겠냐만.

 

테이프를 사지 못하니 나머지는 라디오로 해결했다. 다행히 한 일주일 붙잡고 뚝딱거린 보람이 있어서 - 회로쪽 문제라기보다는 회전력이 전달되는 쪽의 구조상의 고장이었었다. 그걸 이해하기까지 조금 걸렸지만 - 그래도 가끔 문제도 일으키고 했지만 녹음이라는 것도 되기는 했었다. 때로 테이프를 씹기도 하고, 때로 아예 먹통이 되기도 하고, 가끔 생각없이 녹음버튼 눌렀다가 아예 전에 녹음한 것을 날려버리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빨간색 녹음버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내 주위에 머물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라디오 들을 때면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 공부를 하거나 다른 뻘짓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나오면 바로 녹음버튼을 눌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데크에는 항상 공테이프가 들어가 있엇고, DJ가 노래를 소개하는 멘트를 하면 그 순간 내 손가락은 녹음버튼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DJ의 멘트가 끝나는 순간을 노려 녹음버튼, 그리고 노래가 끝나는 순간 해제. 깔끔하게 노래만 녹음하자면 약간으 수고는 필요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노래들 녹음하고 나면 그것 가지고도 또 늘어지도록 들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애써 용돈 모아 산 카세트테이프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늘어지도록 들어야 했었다. 애써 녹음한 테이프들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특히 녹음해서 듣는다고 아무거나 히트곡이라고 녹음하는 게 아니라, 공테이프도 아깝다고 그냥 듣고 좋은 것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해 듣고 싶은 그런 음악들만 선별해 녹음했기에 가치가 어마어마했었다. 카세트라디오가 박살나고 나서 더 이상 테이프를 들을 수단이 없어지면서 이들 역시 자연스레 이리저리 흩어지며 사라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아들이라고 역차별당했다는 것이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는 미니카세트를 사주더라는 것이다. 비록 싸구려에 재생만 되는 미니카세트였지만 동생에게는 그것을 사주었다. 그러나 아들인 나는 공부해야 한다고 절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있는 카세트라디오마저 부숴버리는 분위기였는데. 나중에는 아마 동생이 사들인 테이프를 얻어 들었을 것이다. 나와는 취향이 약간 다른 히트곡들 - 전영록, 박남정, 소방차, 이선희, 그리고 당시 누구나 당연히 사는 줄 알았던 서태지...

 

아무튼 그렇게 음악을 듣기 시작한 내가 음악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마도 누구나 공감할 MP3였다. 아직 구하지 못한 옛명반들을 찾아, 없는 돈에 어떻게 구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소리바다라는 것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가끔 mp3를 구해 듣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mp3를 듣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였다.

 

참으로 편리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음악을 거의 무제한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으니. 아마 시디로만도 여러 장 굽고 했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발생했다. 너무 쉽더라는 것.

 

어느샌가 음악파일들이 쌓여가면서 그에 비례해 음악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그 전에는 카세트테이프라도 하나 사고 나면 늘어질 때까지 들으며 앨범 안에 심지어 까는 노래까지도 하나하나 모두 들었는데, mp3로 너무 쉽게 다운로드받게 되니, 듣다가 마음에 안 들면 끊고, 바로 지워버리기도 아무 부담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과연 내가 이런 것들을 들어야 하는가...

 

음악의 가치가 사라졌다. 분명 음악의 가치는 그대로일텐데도 내가 직접 노력을 들이고 비용을 들이지 않게 되자 음악의 가치란 다시 한없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당시 내가 마지막으로 돈을 주고 샀던 앨범에 대한 실망과, 그리고 그 무렵 내가 주로 정치나 시사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음악이나 그런 쪽에 관심이 뜸해졌던 것, 그러나 역시 근본원인은 음악의 가치가 너무 싸졌다였을 것이다. 다시 불법으로 다운로드한 mp3가 아닌 음반을 사서 들으려 해도 음악 자체가 그리 뜨악해졌으니.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음원파일을 어떻게든 공짜로 구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리 묻는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 재미있나?"

 

아무런 댓가도 없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공짜로 얻어 듣는 음악이 과연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 음악의 가치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음악을 들어 얻는 것이 무얼까. 의미나 과연 있는가.

 

그로부터 내가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가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워준 것이 예전 그리 어렵게 사서 모으고, 녹음해 모으고 하던 음악들이었다. 물론 카세트플레이어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시디도 꼼꼼히 간수하는 타입이 아니라 케이스부터 박살나면서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르게 되었지만, 이런 경우는 추억이 가치를 대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대신 그만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힘을 빼고 음악을 듣는다. 전처럼 앨범 하나 사려고 끙끙대며 이것저것 알아보고 비교해보고 분석해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간편하게 음원사이트에 등록해서 스트리밍으로 듣다가 마음에 들면 다운로드받는다. 음악을 가볍게, 그닥 크게 가치가 없이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로소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았달까. 그래서 최근 내가 음악을 듣는 취향을 보면 그냥 좋으면 좋다다. 더 좋은 음악이 아닌 단지 내가 듣기에 좋은 음악이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래도 역시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당시 애써 사서 모으고 녹음해서 모으던 음악들이라는 것이다. 추억때문도 있고, 그만큼 몸에 각인되다 시피 된 음악들이라. 음악의 수준의 차이라기보다는 그 음악을 구하는데 들인 노력의 차이다. 무게의 차이다.

 

아무튼 남자의 자격을 아침부터 복습하다가 떠올려 버리고 말았다. 꼬깃한 천원짜리 몇 장 들고서 음반가게 진열대 앞에 서서 이것저것 고민하던 내 모습을. 아마 몇 시간을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 시간에 맞춰 테이프를 넣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며 주파수를 고정하던 것도. 가끔 지나치게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찾던 노래를 놓쳤을 때는 얼마나 아까웠는지.

 

그러고 보니 당시 별이 빛나는 밤에 주말 공개방송에서 한참 웃겨주던 게 이경규였다. 그 무렵 화제거리는 부활과 시나위, 백두산이었고, 김국진과 이윤석이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아마 그로부터 조금 뒤. 아니 이윤석은 한참 뒤. 이경규의 입담이 당시도 그리 웃겼었는데.

 

어쩌면 시간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그 상황들이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들인 노력들, 시간들, 비용들, 그리고 두근거림. 요즘은 확실히 그런 게 없어서.

 

아마 나이 먹어서 취미가 바뀌고 하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만화도 게임도 그리 하나 사려면 손이 바들바들 떨리던 때의 두근거림이 없다. 설렘도 없고 흥분도 없고 너무 쉬워진 탓에. 편리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흐르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바뀌어가는 세상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다. 흐르는 건 흐르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뀌는 것은 바뀌는대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단지 그런 기억을 한 번 쯤 돌아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그냥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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