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 - 배우의 힘, 눈물에 압도되다

까칠부 2015. 4. 3. 03:57

바로 이런 것이 배우의 힘일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본 듯한 얼굴이다. 누구일까? 언제 어디서였을까? 미심쩍게 살피던 표정이 언니가 냉면을 포장해 가져다 주었다는 말에 이내 확신으로 바뀐다. 표정없이 돌아보던 눈에 눈물이 차오를 때까지 김현숙(채시라 분)은 그저 눈앞의 노인을 바라만 볼 뿐이다. 아무런 대사도 액션도 없이 그저 표정의 변화만으로 결코 짤지 않은 순간을 혼자서 가득 채우고 있다. 놀라움도 반가움도 아닌 서러움을 과연 무엇이라 말로써 설명할 수 있을까?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곳에 남편이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남편이 서 있다. 먼 기억이 시간을 뛰어넘어 눈앞의 풍경에 겹쳐진다. 딸들은 아직 어리고, 남편도 아직 젊다. 전혀 낯선 노인의 모습이 된 남편의 주위로 어른이 된 딸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꿈인가? 현실인가? 혹시 착각은 아닐까? 자기가 어떻게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리워 한 만큼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차라리 그래서 더 원망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차라리 이대로 눈앞에서 사라지라. 아니 그것은 차라리 필자가 가진 말의 빈곤함이며 천박함일 것이다. 이렇게밖에는 말로써 표현할 방법이 없다.


바로 직전까지 사이좋게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 한순간에 표정이 바뀐다. 친구처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남편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이 달라지고 만다. 호텔에서 스파를 하기 위해 장모란(장미희 분)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갑작스럽게 태도가 바뀌며 장모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같은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전혀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간 장모란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한 편으로 같은 여성으로서 장모란의 불행했던 삶을 연민하고 동정한다. 이중적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하나의 표정만을 짓는 경우란 거의 없다. 하나의 감정만 내보이는 경우도 없다. 그 모든 것이 김혜자(강순옥 역) 한 사람 안에 녹아있다.


대본을 쓰는 것은 작가지만 결국 그 대본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다. 장면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지만 그 장면들을 채워넣는 것도 역시 배우의 몫일 것이다. 실제 작가의 의도와 감독의 구상을 시청자에 전달하는 것은 무엇보다 배우의 책임인 것이다. 그만큼 더 많은 것들을 넉넉하게 채워넣을 수 있다. 말로써 다하지 못할 말들까지도, 화면으로 보이는 그 너머의 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살아숨쉬는 듯한 디테일의 대사와 연출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실제의 일상으로 완성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는 감탄을 넘어선다. 하기는 그런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배우였고, 배우로서 살아온 이들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11회에서 엄마 강순옥을 사이에 두고 마치 사춘기 소녀들처럼 발로 서로를 걷어차며 다투는 김현정, 김현숙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경이와도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관심이며 애정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낙천이고 긍정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어떤 고민과 근심이 있어도, 결국 엄마와 동생의 앞에서 철없는 딸이 되고 함께 까불며 놀던 언니로 돌아간다. 강순옥과 장모란의 관계 역시 한창 살벌할 정도로 심각하다가도 어느새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풀어지고 만다. 처음부터 그런 심각한 일따위 없었다는 듯이.


아마 나현애(서이숙 분)와 박은실(이미도 분)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지 않을까. 나현애의 불우했던 과거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김현숙이 겪었던 이상으로 비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반드시 자신에게 그와 같은 수치와 고통을 준 담임에게 되갚아주고 말겠다. 학창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고통 때문에 딸을 훌륭한 선생님으로 기르고 싶어했다는 정마리(이하나 분)의 말에 자신도 모르는 새 그토록 경멸하고 혐오하던 김현숙을 칭찬하고 만다. 어째서 김현숙은 그럼에도 똑바로 살려 노력하지 않았는가. 다만 나현애가 김현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나말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현숙의 엄마 강순옥도 그녀의 열등감과 과시욕을 지적하고 있었다. 껍질을 깨지 않으면 안된다.


박은실이 마침내 그동안 감춰왔던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김현숙의 남편 정구민(박혁권 분)을 마음에 품고 있다. 김현숙의 친구인 안종미(김혜은 분)에 대해서도 그녀의 유복한 태생과 환경을 질투하고 있다. 그런데 서툴다.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안종미의 말을 듣고 그만 자신의 본모습을 노출시키고 만다. 그러나 안종미는 술자리에서 박은실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하고, 단지 그것을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지만, 상처는 어떻게든 치유될 수 있다. 강순옥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 아주 정확하게 나현애를 평가하고 있었다. 과연...


세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엇갈린다. 이루오(송재림 분) 자신을 염두에 두고 정마리가 물었던 것을 이루오 자신은 자신의 이복형인 이도진(김지석 분)에 대한 것이었다 멋대로 착각하고 만다.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도진과 정마리가 함께 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만다. 지레 물러선 이루오로 인해 정마리는 상처받고 그런 정마리의 상처를 이도진이 위로해준다. 여전히 이루오는 정마리를 마음에 품고 있고, 정마리 역시 이루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도진이 정마리에게 다가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사이에는 악연으로 엮인 서로의 엄마 김현숙과 나현애가 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기억을 잃은 김철희(이순재 분)가 김현정, 김현숙 자매에 의해 안국동의 옛집을 찾는다. 의도한 역설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아프게 했으니 올해부터는 제사도 지내지 않겠다. 그랬더니 더 이상 제사를 지낼 필요 없이 죽었던 남편이 살아나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 딸들처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더 믿기지 않는다. 황혼의 나이에 그토록 밉고 사랑했던 남편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다. 드라마일 것이다. 비로소 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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