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이재민 - 골목길

까칠부 2010. 2. 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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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오늘밤은 너무 깜깜해
별도 달도 모두 숨어버렸어
네가 오는 길목에 나혼자 서 있네
혼자 있는 이길이 난 정말 싫어
찬바람이 불어서 난 더욱 싫어
기다림에 지쳐 눈물이 핑도네
이제 올 시간이 된 것도 같은데
이제 네 모습이 보일 것도 같은데
혼자 있는 이 길은 아직도 쓸쓸해
골목길에서 널 기다리네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골목길
 

 

 

아마 86년이었을 것이다. 이재민 1집이 87년에 나와 잠시 헷갈렸는데, 분명 86년이 맞다. 1집이 나오기 전에 디스코자키들이 만든 옴니버스앨범 "DJ의 사랑이야기"에 먼저 이 노래가 실렸었으니.

 

집에서 드러누워 가요톱텐을 보고 있을 때였다. 깡마르고 키만 훤칠한 안경잡이 사내가 나와 기묘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라기보다는 읊조림? 말 그대로 읊조리듯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듣고 보니 멜로디도 있고 리듬도 있고 노래였다. 이건 뭔가?

 

참 희한하게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었다. 아예 창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일반인들도 그렇게는 안 부를 완전한 생목으로. 그것도 자글거리며 끓는 목소리 그대로. 결코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어쩐지 끌리는.

 

나이 들어 들으니 그러나 그 목소리가 바로 이 노래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아무 감정없이 읊조리듯 부르는 그 목소리 너머에 숨겨진 슬픔이란.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이다. 아마 겨울이거나, 늦은 가을이거나. 밤도 늦고 찬바람도 불어온다. 외로이 비추는 가로등만이 스산하다. 어느 담벼락 창으로 비쳐드는 불빛은 어쩌면 그리도 따뜻한지. 그래서 더 서럽다. 혼자 서 있는 이 길이.

 

그녀는 올 줄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약속조차 되어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생각이 나 옷을 차려입고 나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리라.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녀가 지나다니곤 하던 그 골목길에 홀로 서서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리라. 기약조차 없이. 기대조차 없이. 아니 기다림조차 없이.

 

다리는 아프고, 바람은 차고, 홀로 서 있는 골목길의 어둠이 너무 외롭다.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 같고, 하찮은 것 같고, 그래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서럽고 서럽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신이. 그럼에도 기다리고 서 있는 자기 자신이.

 

참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마치 한껏 울고 난 다음의 갈라진 목소리를 닮았달까? 미친 듯 울고 나서 어느새 멍해진 목소리의 갈라짐을 닮았다. 슬픔조차 넘어선 무정함이라. 서러움조차 잊어버린 어눌함이라.

 

그래서 이 노래는 또 그리 서럽다. 전혀 슬프지 않은데도 그 어두운 골목에 홀로 서 있는 양 어느새 슬픔이 저민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눈물은 핑 돌고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고. 그럼에도 당당한 척 서 있는 사내의 허세란.

 

물론 어려서는 그렇게까지는 못 느꼈다. 단지 참 재미있게 노래를 부르는구나. 전혀 세련되지도 멋지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노래이건만 이리도 노래가 절절히 들리는구나. 뭣도 모른 채. 알 나이도 아니었고.

 

겨울이면 역시 가끔씩 떠오르는 노래다. 노래방에 가서 불러도 이제는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골목길이라 하면 김현식의 골목길보다는 이재민의 골목길을 먼저 떠올렸으니.

 

 

아마 이재민이 해바라기의 이혜민의 6촌동생인가 그럴 것이다. 이미 70년대부터 클럽DJ를 했었으니 데뷔 당시도 나이가 꽤 되었을 듯. 워낙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어 자세한 건 모른다. 클럽DJ출신으로 가수로 데뷔했고, 이듬해 1집의 타이틀곡이 "내 여인의 이름은"이라는 정도밖에. 그 무렵이 또 다운타운문화가 쇠퇴하던 시점이라 이후 앨범들은 죄다 알려지지도 못하고 참패, 어디 음반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내 여인의 이름은"도 꽤나 우울한 노래였다. 노래 자체는 우울할 게 없는데 이재민의 목소리 때문에 무척 우울해지는 노래였다. 아무 기교도 감정도 싣지 않고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이재민의 어눌한 목소리란 골목길이라는 노래 자체였으니.

 

다만 아쉽다면 음원을 사면서 실수로 엉뚱한 앨범의 것을 클릭해버렸다는 것. 원래는 이게 아니라 이재민 1집의 것으로 다운로드받았어야 했는데. 별 것 아니지만 의외로 그런 게 중요할 수 있으므로.

 

그나저나 요즘 이재민은 뭐하고 있나. 2003년쯤 4집을 냈다는 건 나중에 들어 알고 있는데... 그러나 아마 4집도 묻혔을 테지? 가끔은 그리워지는 이름이다. 이 노래처럼. 우울해지고 싶을 때 듣고 싶은.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것일게다.

 

 

 

원래는 이게 아닌 다른 걸 올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 하여튼 벌써 몇 번 째 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계획성이니 하는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 언젠가는 올릴 날이 있겠지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