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리의 여왕 - 주부의 비루한 일상과 추리의 꿈...

까칠부 2017. 4. 20. 10:24

통쾌했다. 사실 나는 추리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는 좋아했는데 최소한 같은 작품을 두 번 읽을 것은 아니라는 편견 같은 것이 있다. 그저 증거 몇 가지와 증언 몇 마디로 가만 앉아서도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면 경찰이 왜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탐정의 추리력이 뛰어나도 결국 실제 수사를 하는 것은 경찰의 발이고 첨단과학의 분석능력이다. 피해자의 사망추정시각이 밝혀지며 진짜 범인이 잡혔던 것처럼.


하긴 그런 점도 포함해서 상당히 흥미로운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냉철한 이성과 예리한 직관으로 사건의 진실을 꿰뚫는 탐정 유설옥(최강희 분)의 주부로서의 일상이 상당히 디테일하다. 물론 그렇다고 시어머니 박경숙(박준금 분)이 유설옥을 심하게 시집살이를 시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음식솜씨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님에도 참아주고 제법 괜찮게 됐을 때는 칭찬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동네여자들이 유설옥의 외도를 의심했을 때도 유설옥의 편을 들어주고 있기도 했었다. 유설옥이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는데도 박경숙이나 시누이 김호순(전수진 분)이 하나같이 남편 김호철(윤희석 분) 앞에서 유설옥의 편을 들어주며 그녀를 걱정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기대와 달리 남편 김호철도 유설옥에게 다정한 태도를 취하고 잇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부의 일상은 참으로 한심하고 비루하다.


경찰이 되고 싶으면서 당당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다. 경찰을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될 행동은 아닐 텐데도 기어이 그것을 숨기겠다고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궁지에 내몰리기도 한다. 알아서 눈치를 본다. 남편을 사랑하고 시집식구들도 가족으로서 신뢰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주눅들며 눈치보게 되는 것이 있다. 아마 주부시청자들을 의식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유설옥은 철저히 현실의 주부가 되고 시청자의 다수일 주부들의 대신이 된다. 요리도 잘 못하고 많은 것들이 어설프지만 그럼에도 아직 꽃을 피우지만 못했을 뿐 남다른 놀라운 재능과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그런 유설옥을 단지 가정주부로만 가두어두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유설옥은 그 질기고 단단한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권상우(하완승 역)의 발성은 더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최강희도 이제는 꽤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더 어울리기도 한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은 모습이 그럼에도 현실의 주부를 떠올리게 만든다. 수다스럽고 때로 주책맞고 그러면서 유쾌하고 우울하다. 극에서 극을 달리는 감정표현을 훌륭히 소화해낸다. 역시 베테랑의 연기는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의외로 주연들이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며 사건의 긴박함과 일상의 여유로움이 조화를 이룬다. 하긴 살인사건마저 다른 추리물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하다거나 혐오스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구대라는 설정 그대로 어쩌면 일상에서 무심코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살인사건의 하나라는 느낌일까.


아무튼 하완승과 콤비를 이루어 해결한 첫사건의 마무리는 상당히 신선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유설옥의 추리능력을 부정했다. 거의 전지전능에 가깝게 이제껏 사건을 주도하며 해결해 온 유설옥의 놀라운 직관과 논리를 한 방에 정면으로 부정해 버렸다. 결국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허구가 아닌 또다른 사실이어야 한다. 개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몽상이 아닌 실재하는 과학이며 형사의 발이어야 한다. 혼자서만 하는 추리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긴 그래서 형사인 하완승이 유설옥의 주위에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사건의 배경도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부인 유설옥의 일상과도 맞닿는다. 그래서 유설옥이 직접 분노하고 있었다. 맞을 짓을 했으니 때린다는 남편과 죽지만 않으면 그것을 방치하는 동네 오빠, 그리고 가족과 같았다면서도 아들을 위해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서 강물에 빠뜨려 죽게 만든 시아버지. 그야말로 주부잔혹사일 것이다. 어쩌면 어디엔가는 실제 있을 것 같은 여성의 현실일수도 있다.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며 그것을 방치하고 방관하다가 결국에는 남이라는 이유로 그를 밀어내고 부정한다. 하긴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는 그런 식으로 남성의 폭력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여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은 아직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수단이며 대상이다. 내가 편할 때는 가족이고 진짜 가족을 위해서는 죽여도 되는 그런 객체다. 사소하게 지나갔지만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현실인가.


디테일이 좋다. 오히려 유설옥의 추리보다는 유설옥이 추리하는 동안 벌어지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검사인 남편과 하완승과의 악연부터, 언제까지 시집식구들을 속이고 탐정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완승의 주변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로서가 아닌 경찰과 경찰을 꿈꾸는 아줌마가 만들어갈 파트너십에 벌써부터 관심이 간다. 추리물로써 상당히 독특하다. 뒤늦게 기대가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