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예상이 맞았다. 조금은 허탈하기도 했었다. 어제 9회가 시작하고 초반 15분 정도 지났을 즈음 정호영(허성태 분)이 30년 전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었는데 잘난 체 하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진범의 모습까지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 김선재(윤현민 분)와 체스를 두며 나눈 대화부터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나 수상하다. 나 비밀 많다. 그리고 결정적인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정호영을 30년 전 연쇄살인의 진범으로 몰아가려는 제작진의 치밀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 특히 부검의 목진우(김민상 분)이 진범일 것이라 확신하게 된 계기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사실 어쩌면 상당히 흔한 장르의 클리셰 가운데 하나일지 모르겠다.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의사와 상당하면서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말이었다. 목을 졸리면서 웃고 있었다. 당연히 피해자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목을 졸리면서도 웃고 있었을리는 만무하니 웃고 있었던 것은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 당연히 사람의 목을 조르면서 자기가 자기 모습을 보기도 쉽지는 않았을 테니 정호영 자신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30년 전 연쇄살인에서 정호영은 단지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모방범죄였던 것이다. 30년 전 우연히 연쇄살인의 현장을 목격하며 생겨난 충동과 호기심이 마침내 어떤 계기로 실제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몰랐다. 목졸려 죽어가는 피해자의 고통스런 표정이 아닌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즐거운 웃음을 짓고 있었을 진범의 모습에서 그 순간 범인이 느꼈을 감정과 감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실제 행동에 옮겨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되었었다. 이전 신재이(이유영 분)가 김선재에게 그가 무심코 건넨 한 마디가 정호영이 살인을 저지르는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라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의 감정과 감각에 대해 알고 싶다. 확인하고 싶다. 잠재되어 있던 정호영의 충동과 욕망을 김선재의 한 마디가 일깨우고 말았다. 그래서 혼선이 빚어진다. 마치 30년 전 살인사건도 정호영이 저지른 것처럼. 단지 진범이 저지른 사건을 보고 모방한 탓에 수법이 같아 보이는 것임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정호영도 끔찍한 연쇄살인마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담하게 김선재에게 핸드폰을 택배로 보내고 그 핸드폰을 통해 연락을 취하며 행동을 유도하는 모습은 과연 잔혹하며 지능적인 연쇄살인마다운 모습이다. 수많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경찰을 농락하며 잡히지 않는 악마적인 천재살인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것치고 태연히 숨어있던 집으로 돌아오다가 화들짝 도망치는 모습은 비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살인자가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법 앞에 처벌을 기다리는 범죄자의 신세인 것이다. 잡히는 순간 여지없이 재판을 받고 죄인이 되어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감히 당당히 경찰과 맞설 깜냥도 안되는 것이 이들 범죄자들인 것이다. 카리스마는 대단한데 그래봐야 존재감없는 일개 말단경찰들도 법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그를 잡아넣을 수 있다.
정호영이 범인이 아니라면 목진우가 범인일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목진우가 진범이고 정호영은 페이크일지도 모른다. 정호영이 연쇄살인범인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 충분히 목진우를 의심하게끔 사소한 단서들을 던져두고 그것이 오히려 함정인 것처럼 2007년 이후 저질러진 살인사건의 진범이 정호영임을 강조해 보여준다. 같은 수법의 연쇄살인이니 진범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호영이 진범이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인데다 너무 쉬웠다. 의심하기 시작하고 확신으로 바뀐 순간 아예 알고 있었다는 듯 제작진이 앞서 진범의 모습을 보여준다. 목진우였다. 알고 있었기에 더 황당하기도 하다. 마치 제작진의 손안에서 멋대로 놀아난 듯한 불쾌감마저 든다. 스릴러에서 불쾌감은 쾌감의 다른 이름이다.
또다시 트리거가 되었다. 김선재가 정호영의 트리거가 되었다면 이번에는 30년 전 자신을 잡지 못했던 형사 박광호의 한 마디가 목진우로 하여금 다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드는 방아쇠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이다. 정호영은 단지 자신의 아류일 뿐이다. 김선재도 강조했었다. 연쇄살인범들의 공통적인 현시욕에 대해서. 새롭게 사건이 흐르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정호영이 가짜인 것은 아니다. 정호영도 분명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다. 단지 박광호가 잡고자 하는 것은 30년 전 연쇄살인의 진범 목진우다.
죽음은 후회를 남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가 해주지 못한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했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이상 세상에 없다. 아내도 죽고 딸도 행방을 알 수 없다. 모두가 자기의 잘못이다. 자기의 죄다.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박광호가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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