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너무 당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의심만 늘었던 모양이다. 윤과장(이규형 분)이 범인 맞았다. 그것도 어떤 식으로든 이윤범(이경영 분)과 연결되었을지 모른다는 개연성마저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윤범이 감추고 싶은 치부를 지우고 의심스러운 사위 이창준(유재명 분)에게 경고하는 한 편 영일재(이호재 분)가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회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아직 비어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겸허하게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말을 경청할 뿐.
그만큼 이윤범이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는 뜻일 게다. 범조계의 원로로 장관까지 지냈던 영일재가 그저 이윤범이 두려워서 몇 년을 숨죽이고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저 가족을 지켜보겠다고 결정적인 증거까지 손에 쥐고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일개 평검사인 황시목(조승우 분)에게 무슨 대단한 힘이 있어서 영은수(신혜선 분)까지 지켜줄 수 있겠는가. 영은수를 해치고자 하는 것이 진짜 이윤범이었다면 이창준마저도 그를 지켜주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나마 영일재가 믿고 자신의 딸을 맡길 대상이 당시로서는 황시목이 전부였을 테니까. 황시목이라면 설사 그 이윤범이라 할지라도 쉽게 굴복하거나 회유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역시 그를 위해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은 영일재 자신이었다.
이창준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아내 이연재(윤세아 분)의 재산을 조사하고, 비서를 통해 항공기 티켓을 전달받고. 하필 이윤범이 주가조작을 꾸미는 서류를 받아들고 바로 화장실부터 들르고 있었다. 역시 작가에게 단련된 의심병이다. 의심이 너무 지나쳐서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의심이 무서운 점이다. 너무 모든 것을 의심하다 보면 정작 믿어야 하는 것들마저 의심하고 만다. 믿어야 하는 것들까지 의심하고 나면 여기가 어디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존재마저 희미해져 버린다. 물론 드라마 보면서 거기까지 가는 사람은 드물다. 실제 현실을 살면서도 어디선가는 자기만의 한계를 긋기 마련이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더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한 가지 명제만은 참으로 남았던 데카르트처럼. 아내와의 만남을 후회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역시 그것 하나는 남겨놔야 할 것이다. 아내와의 만남을 후회할 만큼 아직도 이창준은 자신의 아내 이연재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면 이후 그의 선택은 무엇일 것인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추리다. 살해당한 영은수의 방에서 김가영이 말한 07과 관련한 낙서가 나왔다. 정확히 수중폭파부대 UDT의 뒷글자인 D와 T였다. 하지만 글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은수가 07에 대해 전해들은 것은 죽기 전날 한여진(배두나 분)의 집에서 했던 회식자리에서였다. 07이 장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 영은수의 그동안 동선을 모아본 결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장소가 아니면 사람이다. 그렇다면 영은수는 집과 검찰청만을 오가던 일상 어디에서 김가영이 보았던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일까? 낙서를 한 것도 시간상 다음날 죽기 직전 집에 들렀을 때가 아닌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일 것이다. 그 다음에 회식에서 우연히 나눈 윤과장의 복무부대에 대한 이야기가 단서로 떠올랐다. 그때부터 D와 T의 정체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런 게 어렵다. 지나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데 너무나 사소한 단서들이라 쉽게 지나치고 만다. 하나로 모아 엮으니 전체의 진실이 드러난다. 뻔히 내용을 짐작할 것 같으면서도 하나씩 진실을 향한 길을 찾아가는 황시목의 날카로운 직관에 그저 감탄부터 하게 된다.
뇌절제술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수술을 받았다고 감정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탓에 부작용이 생긴다. 영은수가 살해당하고 벌써 황시목은 동요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지만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운전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부검을 참관하고 병원 복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한여진이 알게 되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탓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마는 황시목을 보면서 강한 여자 한여진은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 단순히 연민에서 끝나기에는 안 그런 척 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이미 너무 가깝다.
하여튼 나쁜 놈이다.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지른다. 편법상속을 통한 탈세는 어차피 대부분 재벌들이 하는 짓이니 그러려니 한다. 군장비 도입과정에서의 사기야 당한 국방부가 멍청한 것이다. 그 정도는 조금만 노력해서 조사해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실제 마츠야마측 관계자와 이윤범이 만나는 자리에 국방부 장관까지 동석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제 정보조작을 통한 주가조작이라니. 그것을 감시해야 할 금융감독원까지 이윤범 앞에서 눈을 질끈 감는 시늉을 해보이고 있었다. 그만한 규모의 대기업에 벌어들이는 돈만 아득한 수준일 텐데 거기서 돈 더 벌어보겠다고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주가조작에까지 손을 대다니.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체면이고 염치고 없고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한 편으로 천박한 한국 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돈의 힘에 굴복해서 자신의 책임마저 아무렇지 않게 저버리는 관료조직의 부패까지. 도대체 이윤범의 힘은 이창준 말고도 어디까지 검찰 조직 내부에 미치고 있는 것일까. 윤과장과 직접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분명 누군가 사이에 있다.
슬슬 정리수순이다. 마지막 고리가 남았다. 어떻게 이윤범까지 엮을 것인가. 굴지의 대기업을 배경으로 둔 이윤범까지 찾아내서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허무해지는 드라마나 영화가 너무 많았다. 억지로 무리해가며 논리도 개연성도 없이 승리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했다. 이번에는 다를까? 어떻게 이윤범을 찾아낼 것인가? 이윤범 앞에 이르게 될 것인가? 남은 과정이 중요하다. 숨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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