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조작 - 현실만 못한 드라마, 드라마보다 너무나 극적인 현실

까칠부 2017. 7. 26. 08:28

이른바 작가의 상상력에 대한 회의로써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것이 바로 소련의 해체일 것이다. 아서 클라크의 SF소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도 소련은 등장하고 있었다. 인류가 자유롭게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공산주의국가 소련은 건재하고 있었다. 불과 1980년대까지도 거대제국 소련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 예언했다면 허황되다며 비웃음만 들었을 것이다. 아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그 일이 1991년 12월 26일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현실은 상상보다 더 극적이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때로 시큰둥해지는 것은 드라마의 상황이 그다지 실제 현실에 비해 창의적이지도 극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의 경험으로, 단지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그 전부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럴 것이라 알았고 혹은 느껴왔었다. 당장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쓰다시피 했던 실제의 '성완종리스트' 사건에서도 정작 드라마에서보다 더 냉정하게 무심하게 언론과 검찰, 정치권, 심지어 국민들까지 나서서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왜곡한 채 덮고 있었다. 정작 리스트의 대상은 정권과 관련된 인사들이었지만 언론과 검찰, 정치권, 그리고 국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당시 야당의 책임으로 돌리며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드라마에서는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저리 호들갑들을 떨어대는 것일까?


당연히 언론은 진실을 왜곡할 것이고, 검찰은 범죄를 감추고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려 할 것이며, 주요 참고인들은 협박과 회유에 못이겨 거짓을 진실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더 어떤 반전 같은 것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이대로 너무 사실대로 흘러가면 재미없다. 차라리 픽션이면 화도 나고 긴장도 하겠는데 원래 현실이 그렇다 보니 드라마에서도 그와는 다른 것을 보았으면 싶다. 화조차 나지 않고 아예 시큰둥해지는 것은 설마 드라마에서까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이 오물투성이 시궁창같은 현실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주인공 한무영(남궁민 분)이 좌충우돌 동분서주하며 진실을 밝히려 애써도 일개 찌라시의 기레기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예상대로 되었다. 기껏 목숨걸고 뛰어들어 살인현장을 찾아내고 증거까지 확보해 놓았건만 결국 저들의 수작 앞에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반전도 뭣도 아닌 그냥 차가운 현실이다.


물론 정권이 바뀌었다. 정권이 바뀐 만큼 현실도 많이 바뀔 것을 기대하고는 있다. 그렇더라도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사람 사는 곳이야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유혹에 이끌리고 두려움에 꺾이고 마는 것이야 당연한 본능이며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그런 인간의 나약함마저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법이, 정의가, 질서가, 사람들의 양심이 그런 인간의 나약함마저 지탱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대중이 현명하다면. 그래서 항상 의심하면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언론의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정부나 검찰의 발표마저 온전히 사실로써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정작 대중이 저들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면 진실을 밝히고 알리려는 노력도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 사회의 현실이 그랬었는가. 과연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그런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속이면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무지렁이 대중들이기는 하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고 무엇보다 사람이 바뀔 것인가. 하긴 그래서 드라마이기는 하다.


얼마나 저 위까지 쫓아 올라가야 할 지 모른다. 당장 밝혀진 것이라고는 언론사 임원인 구태원(문성근 분)과 거물의 하수인으로 여겨지는 조영기(류승수 분) 정도다. 그밖에 손발도 못되는 피라미들인 형사 전찬수(정만식 분)와 박응모(박정학 분) 정도만이 말단으로 노출되어 있다. 고작 이들 말단들만 잡는데도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단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도 명확한 박응모의 범죄마저 철저히 덮어줄 수 있는 그들의 존재야 말로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다. 어차피 너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론도, 검찰도, 그리고 대중도. 저 위에서 저들은 세상을 비웃으며 굽어보고 있다. 마지막에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가능한 꿈이며 환상이다. 드라마에서까지 현실처럼 우울하다면 세상은 재미없는 곳이다.


남궁민의 연기가 마치 전작 '김과장'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연기폭이 제한된 배우가 아님을 알고 있다. 의도적으로 남궁민이 가진 성공한 캐릭터를 활용하기 위한 주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아직까지 유준상(이석민 역)의 비중은 크게 없다. 과연 구태원이 지배하는 대한일보에서 현장에서도 배제된 이석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아예 언론이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어느 방송사의 해직기자들과 좌천된 노조원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결국 선거에서 이기지 못해서 언론인들을 지키지 못했다. 이석민에게도 기회는 돌아올까? 어느새 세월이 더 무겁게 내려앉은 문성근은 켜켜이 타락이 겹쌓인 지식인의 얼굴을 무리없이 소화해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악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 나쁜 짓을 저지른다.


크게 새로울 것은 없는 구성과 설정이다. 아직까지 한무영이 유망한 국가대표 유도선수였다는 설정은 사족처럼 느껴진다. 형의 죽음도 사회의 정의를 개인의 복수로 치환하는 공중파다운 안이함이다. 사회의 정의보다는 개인의 원한이 시청자에게도 더 직접적이다. 세상이 모르는 부정과 비리가 있고, 이 사회의 법과 정의가 처벌하지 못하는 죄와 악이 있다. 누군가는 그 진실을 밝혀 모두에게 알리려 한다. 그런데 알리면 뭐라도 달라질까? 날이 덥기는 더운 모양이다. 갈수록 머릿속은 차가워진다. 그래도 드라마다. 단 하나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