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단단한 방패를 뚫기 위한 그보다 더 날카로운 창일 것이다. 꼬일대로 배배 꼬인 구멍을 열기 위해 그보다 더 꼬이고 비틀린 열쇠가 필요한 것이다. 하필 그 반대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승리와 성공만을 추구해 온 악역 조갑수(전광렬 분)가 있었다. 마이듬(정려원 분)의 보스인 민지숙(김여진 분)마저 오래전에 이미 한 번 그에게 진 적이 있었다. 전직의원에, 유력로펌의 고문에, 심지어 차기시장으로 유력한 인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꿩잡는 매라는 뜻이다.
벌써부터 악연이 깊다. 당사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마이듬의 어머니가 조갑수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뒤 실종된 사실을 알고 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닌 그 이상의 일이 그날 마이듬의 어머니에게 일어났다면 이것은 마이듬 개인의 복수전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이래로 많은 이야기에서 정의의 실현이 복수의 형태를 빌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청자의 입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정의나 도덕, 윤리, 규범, 가치가 아닌 직접적인 개인의 원한이다. 개인의 슬픔이고 분노이고 원망이고 증오다. 너무나 밉고 싫은, 더구나 두렵기까지 한 상대를 이기고 쓰러뜨림으로써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는 것을 정의의 실현과 등치시킨다. 그러므로 악을 응징하고 죄를 벌하는 것은 모두에게 옳다.
피해자의 사정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면 피해자의 상황이 어떻든 아랑곳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함정을 파기도 한다. 피해자는 상처입고 울고 있지만 그래도 검사로서 이겼으니 되었다.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으니 되었다. 당장이야 사건이 작으니 피해자가 입어야 했던 상처와 고통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언젠가 이보다 더 큰 사건과 마주치게 된다면.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큰 죄와 악을 처벌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더구나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과 수단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면. 법이 더이상 정의의 편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을 많이 알고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악과 죄의 편에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데 법을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
얼마나 법을 잘 이용하는가에 따라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기도 한다. 명백히 자신이 저지른 행위마저 사라지고 하지도 않은 일로 악과 죄의 낙인히 찍히기도 한다. 정의와 진실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 과정의 정당성과 결과의 정의 모두를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보호와 가해자의 처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진욱(윤현민 분)이 마이듬의 파트너로 설정된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부모의 보살핌도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악착같이 지금의 자기까지 올 수 있었던 마이듬에 비해 여진욱의 경우 어머니가 당장 밝혀진 것만 오피스텔을 두 채나 소유한 한 마디로 건물주다. 덕분에 매사가 절박한 마이듬에 비해 출세따위 바라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이상을 쫓을 수 있는 여여유과 말과 행동에서 묻어난다. 피해자의 보호가 우선이다. 그보다는 가해자의 처벌이 우선이다. 바로 당장 제 3자의 입장에서 마이듬의 편에 서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게라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범죄자들의 죄를 밝히고 악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비상의 상황에는 비상의 수단이 필요하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법치는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법이 오히려 죄와 악의 편에 서는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조갑수를 잡을 수 있다. 진정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반영웅이다. 타락한 현실이 불러온 부정한 존재다. 하긴 마이듬이 그렇게 살아온 것 역시 그런 현실에 적응한 결과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참 나쁜 년이다. 피해자의 상처나 아픔과 상관없이 사건을 오로지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 승리만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그 성과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데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원래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그 이기가 모여서 이타를 이루는 것이다. 검사로서 출세하고자 하는 이기가 범죄자와의 재판에서 승리하여 그를 처벌하는 것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공공의 정의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의 희생과 피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녀는 마녀다. 마녀가 필요한 시대다. 우울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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