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비루한 김희성과 마치 조선처럼

까칠부 2018. 7. 23. 00:46

김희성은 어쩌면 조선과도 같다. 조부로부터 이어진 악업을 막대한 재산과 함께 물려받았다. 당연히 조부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몹쓸 짓들을 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는 없다. 조부가 해 온 일들이 잘못이면 반성하고 바로잡던가 아니라면 문제없다 당당히 외치던가. 결국 망설이며 외면하고 도망치고 있던 사이 정작 사랑하는 사람이 된 정혼녀마저 놓치고 말았다. 무엇보다 조선을 상징하는 듯한 고애신을 탐내는 두 남자 사이에서도 물색모르고 속좋은 소리나 늘어놓고 있었다. 두 남자는 고애신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김희성을 죽일 수도 있었다.

 

바로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보인 나약함이었다. 조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과 조선의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수백년을 그렇게 머리로 알고 입으로 떠들면서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 나라가 망하네마네 하는 구한말에조차 입으로 떠드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기껏 무언가를 해보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그런데도 침략자이자 약탈자인 외국인에 기대어 무언가 해보겠다고 사람좋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지금 자기 앞에 앉은 남자들이야 말로 자신의 약혼녀를 탐내고 자신의 가족들에 원한을 품은 적들인 것이다. 구동매도 유진 초이도 당사자들은 모두 아는데 김희성만 모른다.

 

사랑인가? 원한인가? 욕심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조선이란 단지 부모를 죽인 원수의 나라라고만 여겼었다. 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한때 자신이 났을 뿐인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두고 온 원한 만큼이나 큰 은혜도 입었고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처지를 이해하게 된 이들로부터 어머니의 유품까지 건네 받게 되었다. 유진 초이의 고백은 과연 부모를 죽인 김대감의 손주의 약혼녀를 빼앗으려는 복수심인가? 아니면 단지 그를 핑계삼아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려는 것인가?

 

하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시작이 무엇이든 동기가 무엇이든 결국 이르게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어느 것일 것이다. 단지 원수 김대감의 손자인 김희성에 대한 복수로 시작되었어도 고애신을 향한 마음이 진짜라면 그것만이 진실하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면. 어찌되었거나 고애신의 고백에 답한 이상 그들은 연인으로 함께하게 될 것이다. 감질나게 오가던 그와 그녀의 감정들이 진짜가 되고 현실이 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부모를 죽게 만든 김희성의 가문에 대한 복수심이 앞서고 있을 뿐.

 

구동매와 이완익이 찾던 물건의 정체가 밝혀진다. 하필 유진 초이가 조선인에 대해 베푼 잠시의 선의가 전혀 뜻밖의 사람에 의해 생각지도 않은 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감당하기에 너무 크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비밀자금과 관련한 문서였다. 고종과 이완익 모두 서로 다른 이유로 그 문서를 쫓고 있었다.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아무 대비 없이 유진 초이의 손에 쥐어졌다. 행운은 혼자서만 오지 않는다. 어차피 마음대로 찾아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 돈의 행방을 쫓는 이완익이나 구동매나 하나같이 살기가 등등하다. 선택해야 한다. 그들과 밎서거나 그들과 함께 하거나. 그 길은 고애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도 이어져 있다. 고애신과 유진 초이는 어디까지 나란히 함께 걸을 수 있을까.

 

몇몇 장면은 흐름을 깨뜨릴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조선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할 것 같던 미국의 미망인이 갑자기 어설픈 조선말을 쏟아낸다. 당황한 이완익과의 말싸움도 흥미롭다. 개연성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재미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승인 장포수가 훔친 총을 자기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미국 공사관에 돌려줘야 한다는 말에 놀라 당황하는 고애신의 모습도 귀여웠다. 고고하던 양반가의 규중규수가 한 순간 망가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진지하던 분위기에 억지같은 웃음이 맴돌게 된다. 결국 유진 초이는 고애신이 침입자인 것을 알면서도 함께 돌아가기를 선택한다. 갑자기 나타난 약혼자에 대해 묻는 유진 초이의 표정이 절절하다. 그들은 만났다. 함께했다. 우연히 마주친 가마의 주인을 알아볼 정도로 그들은 사랑하고 싶다.

 

세 남자가 자리에서 마주쳤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세 남가 모여 각자 술을 마셨다. 조선의 운명같은 사랑이야기가 시작된다. 전혀 달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한 마디 LOVE라는 단어에 이끌여 여자는 남자를 사랑란다. 운명처럼 이끌려 그들은 사랑을 한다. 여자의 마음은 이미 한 곳을 향하고 있다. 꿈인가? 행복인가? 사랑인가? 사랑하고 싶어진다. 마주쳤을 때도 그들은 서로를 향한다. 결국 서로를 보는 것은 단 두 사람이었지만. 이 와중에도 그들은 사랑을 한다. 그들은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