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 밴드역사상 가장 드림팀에 가까운 구성이 아니었을까. 결국 늘 그렇듯 멤버들 사이의 불화로 2집 한 장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신대철, 김종서, 강기영, 김민기의 구성은 사기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나같이 당시 락씬에서 최고로 손꼽히던 연주자고 보컬들이었다. 전에도 후에도 한국 밴드에서 이만한 구성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역시 오늘의 주인공은 보컬 김종서였다.
원래는 레드제플린에 대해 쓰려 했었다. 그런데 로버트 플랜트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아무래도 한국의 로버트 플랜트인 김종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헤비메탈은 안된다고 많이들 말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인에게 헤비메탈은 불가능하다. 그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로버트 플랜트나 이안 길런 같은 고음보컬의 부재였었다. 그나마 당시까지 가장 노래 잘한다던 김현식과 전인권이 2옥타브 후반 정도의 음역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이니. 몇 년 전이던가 가수 현미가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서 요즘 젊은 가수들은 고음이 너무 잘 올라간다며 신기해한 것도 괜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해외의 메탈보컬들 같은 고음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깨뜨린 것이 바로 김종서였다. 사실 썩 만족스런 수준은 아니었다. 최소한 당시 내 귀에는 그랬다. 너무 가늘다. 너무 여리다. '남자의 자격'에 출연했던 베이시스트 이태윤도 그래서 당시 김태원과 함께했던 밴드 'The End'의 보컬로 김종서를 영입했던 것을 비판하며 배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당시 3옥타브를 넘는 남자보컬이란 김종서 말고는 대체불가였으니. 당시 김종서와 더불어 3대보컬로 일컬어지던 임재범과 김성헌마저도 최소한 음역에 있어서만큼은 김종서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백두산이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메탈사운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김종서 역시 한국인도 고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후 이덕진이나 김경호, 박완규 같은 고음보컬들이 한국 대중음악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정교하게 발달한 이론과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기술로 쉽게 고음을 내게 되었다.
시작은 불우했다. 아마 처음 김종서가 시나위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고음을 높이 사서였을 것이다. 다른 것이야 어찌되었든 농구선수의 키만큼이나 보컬로서의 음역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재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귀에도 들리는 지나치게 가늘고 여린 김종서의 목소리가 가지는 불안함은 라이브에서 바로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이나 집이 멀고 또 가난해서 연습실까지, 혹은 공연장까지 걸어서 오가야 했던 당시 김종서의 사정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김태원과 'The End'를 하던 시절에도 걸어서 오가느라 연습시간에 항상 늦었다 했었으니. 그리고 잘렸다. 그보다는 어느날 갑자기 김종서가 공연에도 나오지 않고 잠수탔더라는 것이 신대철 쪽의 주장이다. 이래서는 같이 못하겠다. 이때부터 김종서의 회고에 항상 등장하는 다리아래에서의 연습이 시작된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 교내밴드인 '검은진주'의 보컬로 음악활동을 이어갔었는데, 사실 당시 검은진주는 심지어 드럼이 김종서의 노래를 들으며 박자를 찾을 정도로 실력면에서 그냥 대학가에서 흔한 아마추어밴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김종서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벌써 언더그라운드씬에서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잘나가던 밴드 가운데 하나인 The End와도 같은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때 The End의 리더 김태원의 제안을 받고 부활의 초대보컬로 영입된다. 그때까지 The End의 보컬은 베이스를 치던 이태윤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부활의 음악까지 크게 바뀌게 된다. 이태윤은 바로 그 사실을 자신이 The End를 그만둔 이유로 설명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때 김태원의 평가로 가장 완벽하게 로버트 플랜트를 카피하며 The End가 부활로 바뀌는 순간 그 전성기를 이끌고 있었다. 이후 매니저였던 백강기와의 불화로 이름을 바꾼 부활을 그만두고 이승철이 그를 대신해서 부활 1집을 녹음하게 된다. 참고로 1985년 부활이 강변가요제에 '너뿐이야'로 참가할 당시 보컬이 김종서였었고, 이때 역시 강변가요제 예선에서 캠퍼스 밴드 '파이오니아'의 멤버로 참가한 이승철을 만나게 된다.
원래는 부활을 그만두고 바로 시나위로 돌아가려 했었지만 당시 시나위에는 임재범이 있었다. 시나위 1집은 그래서 그 임재범이 녹음하게 된다. 시나위와 부활 모두 김종서가 초대보컬이었지만 정작 1집은 모두 다른 사람이 녹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갈 곳을 잃은 김종서는 다시 이근형과 손잡고 '작은하늘'이란 밴드를 만드는데 이때의 이야기는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공연을 마치고 받은 돈으로 차를 탈까 밥을 먹을까 하다가 밥을 먹었는데 그날따라 강바람이 그리 추웠다던가. 그래도 아마 이근형의 집안이 잘살았어서 어떻게 밴드는 꾸려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임재범이 뛰쳐나간 시나위로 다시 신대철의 제의를 받아 돌아가니 그리고 나온 음반이 이 시나위 2집이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아는 사람만 아는 언더그라운드의 강자였다면 이때부터는 대중적으로도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밴드가 있다. 어찌되었든 그 목소리는 지금도 독보적이니까. 상당히 크게 히트하기는 했지만 과연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 밴드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종서의 일대기만으로도 몇날 며칠을 꼬박 쓸 수 있을 정도다. 처음 노래도 못해서 잘리던 생판 아마추어가 어느새 곡쓰기까지 배워서 또래에서 손꼽히던 신대철과도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었다. 2.5집까지 함께 한 뒤 신대철과 대판 싸우고 그만뒀지만 신대철이 방위를 끝내고 4집을 준비하며 서태지 등과 함께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이때는 4집 대부분의 노래에 김종서의 손길이 미쳐 있다. 많은 노래들을 공동으로 혹은 혼자서 작곡했고 개인적으로 시나위 앨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이때의 4집이었었다. 하지만 역시나 한 산에 호랑이가 둘일 수 없는 것처럼 신대철과의 갈등과 여러 주변적인 요인으로 인해 김종서와 서태지는 탈퇴하고 음반은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잊혀지게 된다. 그리고 김종서는 솔로로 대중앞에 나서게 된다. 대중가수로서의 김종서는 너무나 잘 아는 바일 테니까. 그래도 당시 메탈씬에서의 짜증날 정도로 가늘고 높게 치솟아 오르던 김종서의 보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중가수로서도 작곡가로서나 보컬로써 큰 획을 긋기는 했지만 말이다. 역시 한국에서는 솔로를 해야 한다.
뭐든 첫걸음이 힘들다. 한국에서 록은 안된다. 한국에서 메탈은 안된다. 한국에서 고음보컬은 안나온다. 카피로 시작했지만 이제 누구도 김종서의 노래를 들으며 로버트 플랜트를 떠올리지 않는다. 하긴 로버트 플랜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그리 많지 않다. 사실 과연 김종서가 얼마나 로버트 플랜트를 똑같이 따라했었는지 기억도 가물하다. 이제 김종서는 김종서다. 오히려 김종서를 따라하며 보컬로써 성장한 이들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종서가 김종서인 것은 최초이면서 유일하다는 뜻이리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덕분에 요즘 70년대 밴드음악을 다시 찾아 듣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보니 JTBC 에서도 밴드를 주제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한다던데. 말하자면 음악적인 고향 같은 것이다. 가장 그리운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 역시 음악은 70년대 밴드음악들이 좋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음악들도 적지 않음에도. 그리고 한국 밴드의 역사는 80년대부터 시작된다. 그때 그곳에 김종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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