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년이나 되었구나. 하지만 내가 정태춘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였다. 동아리 선배가 가져온 카세트테이프 가운데 정태춘 1집과 카펜터스 1집이 있어서 그때 두 가수의 음악에 대해 제대로 듣고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같이 내가 지금도 항상 즐겨듣는 음반들이다.
처음 내가 정태춘의 음악을 듣고 떠올린 감상은 '한국인'이라는 한 마디였다. 하긴 70년대 한국 대중가요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했다. 포크에서 시작했지만 송창식이든 김정호든 한국의 토착적인 정서와 음악을 서구에서 시작된 새로운 양식의 음악에 담아내려 많은 노력과 시도들을 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태춘의 음악이 특별했던 것은 창법이며 노랫말까지 온전히 한국만의 그것을 흠뻑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랬는데. 정태춘의 음악에서는 구수한 된장냄새가 난다고. 더 지독한 청국장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어스름 저녁에 멀리서 돌아오며 맡는 그런 정겨운 냄새와 닮았다고.
'촛불'을 가장 먼저 들었고, '떠나가는 배'를 즐겨 들었고, '탁발승의 노래'를 따라불렀으며, '사랑하는 이에게'에 흠뻑 취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도대체 어떤 노래를 올려야 정태춘이라는 음악인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결국 돌아돌아 선택하게 된 노래가 바로 정태춘 박은옥 5집에 수록된 이 노래 '우리들의 죽음'이다. 대중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음반인데, 바로 이 음반으로 인해 음반 사전검열에 대한 헌법소원이 이루어지고 위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일제강점기 이래 이어져 오던 사전검열제도가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서태지와 아이들 팬들은 4집과 관련해서 사전검열제도가 없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출발은 그보다 한참 전 1990년 녹음되고도 6년 동안이나 발매되지 못했던 이 음반이었으며,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전부터 사전검열제도를 비판하며 저항해왔던 가수 정태춘이었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초기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담아내던 정태춘의 음악은 여전히 한국적이지만 더욱 한국의 현실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 1990년이었을까? 솔직히 연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느 가난한 달동네에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남아 있던 아이들이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불을 냈고 결국 그로 인해 집과 함께 아이들이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참혹했던 뉴스의 내용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었다. 1996년 비로소 사전검열제도가 폐지되고 정식으로 출시된 정태춘 박은옥의 5집을 들으며 오래전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사실 내게는 그리 새삼스런 사건이 아니었었다. 나 역시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고 좁은 단칸방에 동생들하고만 남겨졌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내가 학교에라도 가면 자물쇠로 잠긴 집에는 동생들만이 남아 있어야 했었다. 다행히 집에는 성냥도 없었고 동생들은 성냥을 가지고 놀 줄도 몰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두운 방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반기던 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동생들 손에 성냥이 쥐어졌으면. 아니더라도 주변에 집에 아이들만 남았다가 연탄불에 데이거나 어디 부딪히고 찢겨 다친 이야기가 꽤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 역시 혼자 남아 집에서 놀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머리가 크게 찢어진 적이 있었다. 기억은 없는데 이마에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었다. 학교에라도 가게 되면 그래서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하지만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되지 않은 막내는 집에 혼자 남아 나와 동생을 기다려야 했었다.
내가 라면을 처음으로 끓여먹은 것도 그렇게 동생들하고만 집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다가 배고파 우는 것을 보고 무어라도 먹여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였다. 라면을 끓이는 방법도 몰라서 그냥 차가운 물과 함께 면을 넣고 삶느라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이었는데 배고팠던 동생들은 정말 맛있게도 잘 먹어 주었었다. 원래는 아랫목에 밥을 통에 담아 묻어두었는데 아마 그날만 무슨 일인지 밥을 묻어두지 않고 나가신 탓에 내가 라면이라도 끓여먹어야 했던 것이다. 아마 고작 5살 4살이던 그들 남매들에게는 라면이라도 끓여먹일 오빠나 형이 없었기에 불장난하는 것도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동생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감상이다. 그래도 내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나 자신의 일일 수도 있었다.
당시 서울의 가난한 동네 풍경들이 그랬다. 지금은 그런 풍경을 볼 수 없다. 죄다 밀어버리고 번듯한 아파트단지로 바꿔 버렸으니. 가난한 이들이 그나마 서로 의지해 살 수 있었던 그런 동네들은 남김없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고 높은 아파트단지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가난한 이들은 결혼조차 않고 좁은 고시원에서 의지할 이조차 없이 혼자서 버텨내고 있다. 그러고보면 반복된다. 그렇게 가난한 이들이 모여사는 좁은 고시원에서 방을 데우려 켜놓은 전기장판에서 불이 나서 건물이 타고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아예 없을 거라 무심코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경제는 어렵고 가난한 이들도 많다는데 왜 이리 서울의 거리만은 황홀하고 번화한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가수가 없었다. 그런 노래를 짓고 불러주는 가수가 없었다.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인데. 우리 자신들이 사는 현실의 이야기인데. 그저 아름답게 사랑하고 애절하게 이별하는 이야기들만이 세상엔 넘쳐나고 있었다. 이토록 처절하고 이토록 잔인하고 이토록 참혹한 현실을 과연 누가 우리에게 들려 줄 수 있겠는가. 정태춘이라는 가수를 더욱 사랑하게 된 계기였다. 최소한 정태춘의 노래에는 고단하던 가난한 나 자신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그것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어느새 40년이나 지났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러면서도 그동안 무심코 잊고 있었던 것을 반성하며. 새삼 정태춘 박은옥의 음반들을 찾다 들으며 떠올린다. 그리고 결국 이 음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생각케 된다. 정태춘 박은옥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다른 계기였지만 그륵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음악에 있다. 이제는 어쩌면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을 당시의 참혹했던 사건에 대해서. 이제는 대부분이 잊고 있을 너무나 처참했던 당시의 현실들에 대해서. 너무나 부유해진 현실에 잊혀진 지난 이야기들에 대해서. 그 노래를 들려주던 어느 늙은 음유시인을 돌아본다.
여전하다. 라디오로, 혹은 유튜브로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나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한결같다는 느낌이다. 세월이 묻었어도. 시간들이 덕지덕지 끼었어도. 그동안의 좌절과 절망과 체념과 실망과 한숨이 더께처럼 내려앉았어도. 다시 찾아 듣는다. 늙어가는 가수와 함께 감정도 묵어간다. 쉬어간다.
'오래된 음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松田聖子 - 青い珊瑚礁, 새로운 세대의 일본불매와 열등감의 기억 (0) | 2019.07.15 |
---|---|
정태춘 박은옥 - 북한강에서 (0) | 2019.03.05 |
Deep Purple - Highway Star (0) | 2019.01.25 |
섹스 피스톨즈 - God Save the Qeen (0) | 2018.12.26 |
Led Zeppelin - Stairway to Heaven (0) | 2018.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