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가수가 누군지 노래 제목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도 우연히 길가다 한 번 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일본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지만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일본의 대중문화를 상당히 친숙하게 접하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일본의 대중문화를 익숙하게 즐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한 것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다 보니 보따리장수들에 의해 소량이 암암리에 유통되다 보니 어지간히 여유가 있지 않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취미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의아할 수도 있겠다. 사실 반일감정이라면 2000년대보다 1990년대가, 1990년대보다 1980년대가, 1980년대보다 1970년대가, 과거로 올라갈수록 더 극심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일본이 아예 한국을 겨냥해 경제전쟁을 걸어온 지금 거리가 조용한 것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작 이름도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일본 정치인의 말 한 마디에 온 나라가 들쑤신 듯 들고 일어나 집회를 열고 성토하던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인의 허튼 말 한 마디조차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절대 일본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이번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해 어쩌면 오랜 숙제를 풀 계기가 될 지 모른다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개심이란 공포를 전제로 한다. 그냥 미워하는 것과 다르다. 그저 싫어하는 것과도 전혀 다른 감정이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상대의와 거리를 인정한다. 상대를 그대로 둔 채 그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나 판단을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개심은 다르다. 보다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개입하려 한다. 정확히 상대가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밀어내려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개장수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개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다.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기에 그러지 못하도록 한껏 이를 드러내며 경고하려 한다. 만일 자신보다 더 작고 약한 상대라 여겼다면 이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목부터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겁먹은 개가 더 사납게 짖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당시까지 한국사람에게 일본이란 그런 존재였었다. 아주 최근까지도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식민지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많은 한국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었다.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보다 한참 앞서 선진국 - 그것도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이란 많은 한국인에게 두려움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본처럼 되고 싶은데 당장 과거처럼 일본이 우리를 집어삼키려 할 지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사사건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런 격한 반발들은 이내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일본을 이길 방법같은 것은 없다. 아무리 일본이 싫어도 기술에서도 품질에서도 한참 앞선 일본의 상품을 거부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일본의 대부분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역시 당시의 한국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일본의 대중문화를 즐긴다는 것이 더이상 자랑거리가 아니게 되고, 일본 정치인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전국민이 나서서 분노하지 않게 된 것은. 일본에서 아무리 독도를 자기땅이라 주장해도 이제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뭐라든, 일본 지자체에서 뭐라 떠들든 그냥 원래 그런 놈들이겠거니 무시해 버리고 만다. 일본의 정치인들이 또다시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대든 나는 일본으로 여행가겠다. 일본 음악을 듣고, 일본 드라마를 보고,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을 여행하며 일본인과 만나겠다. 아마 일본이 이번에 한국을 상대로 크게 오판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대중들이 일본과 가까우니 아마도 자신들이 한국정부를 공격하면 한국 대중들도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때로 고의적인 도발에도 한국 대중들이 잠잠했던 것은 그런 일본의 주장에 동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80년대, 90년대 한국의 대중들이 일장기를 불태우고 모여서 구호를 외친다고 일본인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 일본에서 다수의 일본인들이 혐한구호를 외친다고 굳이 의식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아마 2000년대 초반이었던가 일본에서 처음 혐한류라는 책이 발간되었을 때는 역시 온 나라가 시끄러웠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극단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아예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원래 그런 놈들이니 그냥 그러겠거니. 오히려 지금은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레 반응하는 듯한 인상마저 받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감의 표현인 것이다. 그만큼 일본인에게 한국은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고. 일본에 대해 무심한 한국과 한국에 대한 혐오를 떠들어대는 일본의 모습이 마치 80년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뒤집어 놓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는 한국이 일본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아직 일본은 우리보다 경제규모도 몇 배나 큰 강대국일 것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우리보다 몇 배 위다. 하지만 쫓고 쫓기는 관계란 때로 그같은 우열관계마저 아무렇지 않게 역전시키고 만다. 실제보다 몇 배 더 공포와 위협을 느끼며 자신을 몰아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사라지고 그래서 더 한국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괜히 되도 않는 시비도 걸고, 이유없는 위협도 해보고, 그리고는 아직 자신이 우위인 것을 믿고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일본을 향한 한국인의 감정은 그냥 싫다. 그냥 하는 짓이 밉다. 그래서 조용하다. 피켓을 들고 모여 구호를 외치거나, 괜히 분에 못이겨 하는 행동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일본이 싫으니 일본 제품도 사지 않고 일본으로 여행도 가지 않겠다. 그렇다고 아예 일본이 싫고 일본인이 싫냐면 또 그건 별개.
여유인 것이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동등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등하다. 그러므로 괜히 쓸데없이 겁먹고 사나워질 필요도 없고, 그런 만큼 사소한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다. 어디나 이상한 인간들은 있고, 바로 같은 나라 안에서도 헛소리를 지껄어대는 인간들은 넘쳐난다. 그냥 그건 그것 이건 이것. 그에 대한 불쾌감이나 반감은 따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호감은 또 따로. 그래서 이번만은 다를 것이란 것이다. 절박하게 두려움에 쫓기며 하는 싸움이 아니다.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에 찌들어 발버둥치는 그런 반발같은 게 아닌 것이다. 어디 한 번 해 보자. 반일을 걱정하는 목소리와 그에 대해 코웃음치는 반응은 그래서 대비된다. 전자는 일본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이었던 시절의 관성이고 후자는 이미 대등해진 이후의 여유다.
경제규모가 3배 차이라지만 1인당 GDP는 이제 겨의 30% 차이다. 경제성장률은 작년 기준 0.8%와 2.7%로 거의 세 배 넘게 차이가 난다. 많은 부분에서 일본을 따라잡고 오히려 추월해서 사실 불매를 하려고 해도 마땅히 할 게 없을 정도로 일본의 상품에 대한 인식도 전과 전혀 다르다. 그냥 안 쓰고 다른 것 쓰면 된다. 일본이 독점하고 있다는 소재와 부품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직접 만들어 쓰면 된다. 당연하게 이야기한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일본을 상대로 우리가 자신감에 넘쳤을까.
우리나라 드라마보다 훨씬 낫다며 일본 드라마를 굳이 찾아보던 것이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일본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어도 예전 느끼던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본에서 리메이크한 드라마를 보면서 코웃음친다. 일본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보면서 별 건가 싶다. 그런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이란 것이다. 지금 일본 불매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세대와 전혀 다른 세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에는 오랜 숙제같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지 모른다. 진심이든 아니든 격식을 갖춰 사과를 했으면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지금 세대들에게는 있다. 그래서 보면서 아직도 나 역시 일본에 대한 열등감에 찌들어 있구나 깨닫게 되기도 한다. 비로소 일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세대가 이 사회의 주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한 편으로 일본을 욕하면서 한 편으로 은밀한 동경을 담아 일본의 대중문화를 향유한다. 굳이 비싼 돈을 내가며, 굳이 어렵고 복잡한 과정까지 거쳐가며, 그런 일본의 대중문화를 일상의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게 된다. 일본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한국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 실제 그런 녀석을 알고 있다. 딱히 반박도 못했다. 그게 바로 1990년대였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했구나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만큼 일본의 대중분화에 대해서도 이제는 아무 스스럼없다. 기성세대는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그들이 해낸 것이다.
굳이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를 제목으로 쓴 이유인 것이다. 굳이 구하기도 쉽지 않은 마츠다 세이코의 음반이며 비디오까지 찾아서 즐기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일본의 청소년들이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 들으며 한국의 문화를 일상에서 누리고 있다. 빛바랜 TV영상만큼이나 그 시간의 차이가 아득하게만 여겨진다.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그 시점에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들도 아주 없지 않다. 그것이 지금 일고 있는 소란들의 이유다. 시간은 벌써 이만큼 흘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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