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 - 예민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흐르는 냇물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있네
노을빛 냇물위엔 예쁜 꽃모자 떠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소년의 슬픈 사랑얘기
가사 출처 : Daum뮤직
이게... 그러니까 몇 년이냐? 어떤 커다란 충격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 아니 처음 듣는 그 순간부터도 마차 오래전부터 들어온 음악처럼 그렇게 친숙했었다. 어려서 부르던 동요와도 같고, 어디선가 흘려듣던 풀피리소리, 냇물소리와도 같던...
아마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과 더불어 멜로디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일 것이다.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듣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이 어느새 영혼이 맑아질 것 같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노래가 아닐까.
그러나 정작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 보면 전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노래가 아니다. 문득 깨달았다.
흐르는 냇물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있네
이 귀절 앞에 붙는 전제,
언제쯤 그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아마도 소년이 풀잎새 따다가 엮어서, 꽃송이까지 넣어 꽃모자를 만든 건 그 아이를 씌워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냇가에 고무신도 벗어놓고 냇물에 발 담그고 아이를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노을이 지더니만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다음의 귀절과 이어진다.
노을빛 냇물위엔 예쁜 꽃모자 떠가는데
왜 주인없는 꽃모자는 냇물 위를 떠갈까? 분명 소년은 그 아이에게 꽃모자를 씌워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터다. 그런데 왜 꽃모자는 주인없이 냇물 위를 떠가고 있을까?
그 답은 바로 다음 마지막 귀절에 있다.
"어느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아마 한 번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황순원의 "소나기". 요즘은 모르겠고 예전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그보다는 영화로 먼저 봤었다. 70년대 범람하던 문예영화의 하나였는데, TV에서 해줄 때 꽤나 진지하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아닌 풋내나는 떨림을 가졌던 적이 있었기에. 역시나 가까운 곳에 새로 학교가 생기면서 겨우 친해질 때 쯤 헤어지게 되었었고.
소설 "소나기"에서 윤초시댁 증손인 소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소년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있다가 잠자리에 들어 까무룩 잠결에 그 이야기를 듣는다. 소녀가 죽으면서 소년과의 추억이 담긴 옷을 그대로 입혀 묻어달라 했더라는 이야기까지.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난 곳은 냇가였다. 소녀는 징검다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고, 소년은 그런 소녀가 비켜주기를 기다리며 냇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소녀가 처음 소년에게 말을 건 것도 다음날 징검다리 위에서. 돌아보며 "이 바보"라 한 것이 소년이 들은 첫마디였다. 소녀가 죽으면서 그대로 입힌 채 묻어달라 한 그 옷의 추억도 소나기가 내리는 날 소녀를 소년이 업고 냇물을 건너던 것이었다. 냇물은 소녀와의 기억 그 자체였다.
소년은 소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를 위해 곱게 꽃모자를 만들어서는 처음 소녀를 만났던 때처럼 냇가에 발을 담그고 소녀가 나타나기만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시간만 무심히 흘러갔다. 하늘 높이 떠올랐던 해는 어느새 서산으로 지고, 분홍빛 노을이 넓게 퍼진 사이로 구름에 가려진 달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의 기다림과는 달리 꽃모자의 주인은 나타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마 소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녀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타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기에 주인을 잃은 꽃모자만이 냇물 위를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으리라. 소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테니까.
주인 잃은 모자는 냇물을 떠가고, 노을은 저물어 어둠이 깔리고, 어느새 찬 바람이 불도록 소년은 냇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둠이 깊고 별이 뜨도록, 꽃모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서도 여전히 냇가에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부모님이 찾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모르겠다. 예민이 이 노래를 쓸 때 황순원의 "소나기"를 염두에 두고 썼는지. 그러나 아마 많이들 이 노래를 들으며 "소나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징검다리에서 물장난을 치던 소녀와 그런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과, 한가로이 흘러가던 냇물을. 그리고 함께 흐르던 그리운 슬픔을.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노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멜로디는 이리 아름답고.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해맑다. 초여름 햇살처럼 맑고 따사롭다. 아, 어쩌면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간 갑자기 터져나오는 눈물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왠지 모르게 서러워 눈물을 흘리고 나니 햇살이 그리 따사롭더라는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저기 있는 양 밝고 맑고 따사롭더라는 것이다.
그런 것일까? 슬픔이 극에 이르면 오히려 아름답더라. 서러움이 극에 이르니 오히려 아름답더라. 아니면 단지 그냥 어느 산골 소년의 순수한 풋사랑 이야기를 쓴 것일까? 소나기가 아닌 여느 산골소년의 풋사랑 이야기를 그저 감미롭게 흘려낸 것일까?
예민의 목소리는 너무 아름답다. 여성적이지도, 그렇다고 어린아이같지도 않으면서도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섬세한 목소리는 그래서 더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냇물에 비친 노을처럼. 냇물에 비친 꽃모자처럼. 혹은 흐리게 흔들리는 소년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서럽게. 서럽게.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 노래를 듣던 그 순간처럼 마치 당연히 그러한 듯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따라부르고 있었다. 역시나 순수로 돌아간 듯 한껏 힘을 빼고 냇가에서 소녀를 기다리는 소년이 되어. 노을 대신 거리의 네온사인이 붉게 비추고 저녁달 대신 부연 가로등 불빛이.
음악이 들려줄 수 있는 순수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노래. 너무 아름다워 어느샌가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만다. 그것은 소년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소년을 기다리게 만든 소녀의 눈물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어느 지점에 두고 온 나의 순수의 눈물이었을까? 별조차 희미하게 바랜 하늘이 그래서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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