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그럼에도 등동려 떠난 이들이 마주 끌어안을 수 있는 이유

까칠부 2019. 6. 29. 06:55

드디어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 다가온다. 원래도 보기 싫었었다. 어차피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안다. 그렇지 않아도 일상이 분주하고 고단한데 드라마까지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봐야 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불행으로 끝날 것을 아는데 마음 졸여가며 지켜보는 것도 꽤나 스트레스다. 난 원래 비극같은 건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코미디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백이강이 마지막에 송자인을 향해 한 말이 이 드라마를 꾸역꾸역 응원하며 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민족. 서로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이들이 다시 만나는 이유. 서로 다른 길을 가고자 등돌려 떠난 이들이 다시 만나 끌어안고 마는 그 이유. 사실 동학농민전쟁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 조선인들에게 그 이유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었다. 나라가 망한다는데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가? 임금이 내쫓긴다고 그러면 지금은 살기가 좋았었는가? 누가 지배하고 다스리든 지금보다 사는 것만 더 좋아지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당시 조선이나 임금 고종이나 하나같이 희망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든 막장 그 자체였었다.


민족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처럼 결국 일제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왜놈이라며 자신들과 다르게 보는 인식은 있었지만 그런 일본을 상대로 자신들을 구분해 보는 의식은 아직 미약했다. 조선인 이전에 양반이었고, 상민이었고, 백정이었었다. 서로 다른 이해가 조선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우선하고 있었다. 아마 황석주의 기대와 다르게 양반들은 이번 봉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지배신분인 양반들 자신부터 조선과 임금을 구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단순히 왕조가 일본의 그것으로 바뀌는 정도라면 그냥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일본에 충성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많은 양반들이 그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저들은 자신들의 적이다.


원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각지에서 신분과 계층, 직군에 따라 저마다의 이유로 일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1919년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지 9년만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봉기가 한반도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이란 이해공동체다. 다른 민족들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당위공동체다. 상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 싶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양반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절조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도.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사업가들이 자신의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도시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한 편으로 그랬기 때문에 무단통치가 철회되고 문화통치가 시작되자 급격히 일본에 동화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도 했었다. 일본이 적이 아니라 여기는 순간 민족의식은 희석되기 시작한다. 지금도 한국인이라는 민족보다 심지어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우선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째서 그들은 함께여야 하는가. 어째서 그들은 결국 함께일 수밖에 없는가. 그럼에도 백이현은 그들과 함께일 수 없었다. 그곳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백이현과 구한말 일본인들은 닮았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이방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이라는 땅에 그들의 이해가 있었다. 그들의 목적과 이상이 있었다.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있었다. 차라리 형제보다도 더 간절한 무엇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자신이 바라는 그 이상이 옳은 것인지도 확신이 없다. 그 확신을 대신하는 것이 당위다. 나는 지금 동학의 봉기를 막아야 하고 일본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전라도 보부상의 도접장이자 송자인의 아버지로서 송봉길이 지켜야 했던 것들과 그를 위해 해야 했던 선택처럼.


어차피 실패할 것을 안다. 조선을 안에서부터 바꾸기 위해 수 백 년을 응축되어 온 힘이었다. 조선이라는 사회가 가진 모순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겉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조선사회의 근간인 주로 농민들로 이루어진 동학이라는 정체였다. 종교라기보다 이념이었고, 이념이라기보다 결사였다. 그러므로 힘없는 백성들이 뭉쳐서 조선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하필 그 무렵 일본이 앞서 근대화를 이루고 앞선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려 하고 있었기에. 안에서부터 일어난 조선의 힘이 외부에서 침략해 오는 일본과 맞선다. 그것도 조선사회 주류의 방관과 비협조, 심지어 적대 속에서. 가장 큰 비극이 그것이다. 그로써 조선은 한 차례 안에서부터 자신을 바꿀 동력을 잃었다. 다시 이 땅의 주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까지 아직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 걱정하는 명성황후나, 그런데 사실 고종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냐? 기득권이냐? 당시 조선에는 더 많은 백이현들이 있었다. 더 높은 곳에, 더 고귀한 자리에,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며, 더 적극적으로, 혹은 방관하며 일본에 협력하던 또다른 백이현들이 있었다. 그냥 일본만 나빠서 조선왕조가 망했겠는가. 지키려는 의지도 없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또한 없었다. 진정 동학이 맞서 싸우고 부숴야 했던 것은 김개남의 주장처럼 바로 그들이었어야 했겠지만. 결국 동학이라는 조선의 안에서 생겨난 힘은 봉기를 계기로 교주가 처형되면서 더이상 조선의 민중 사이에서도 주류로 남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역할은 다른 무엇이 대신하게 된다. 철저한 실패고 좌절이다.


그래서 보지 말아 버릴까. 어차피 결과야 뻔한 것 포털에 기사가 뜨면 그것으로 대충 어떤 내용이었다 알고 말까? 어차피 질 것을 알고, 그로써 실패하고 좌절할 것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불행으로 끝날 것을 안다. 당장 오늘부터 걱정이다. 다행히 오늘은 컴퓨터 메인보드부터 교체해야 한다. 참 불편하다. 너무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