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아, 씨발 다 죽여버리고 싶다!"
나만 그럴까? 때로 총기난사 등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보면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지금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수 없을 것 같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막막한 절망 속에서 무어라도 해야 한다 여길 때 그것은 자칫 범주를 넘어선 충동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그런 충동에 바로 넘어갈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다.
하긴 그래서일 것이다. 고시원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들 뿐이다. 그토록 강한 척 허세를 부리던 조폭 안희중조차 경찰을 피해 숨어지내던 지명수배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치과의사로 잘나가는 듯 보이던 서문조 역시 어려서 고아로 고시원 주인인 엄복순이 운영하던 보육원에서 자랐었다. 역시나 고아인 변득종, 변득수 형제와 한국사회에서도 주변에 있는 조선족 출신의 홍남복까지. 엄복순의 성장과정도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로 여기느냐 따져물을 때는 진심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고시원이라는 폣쇄된 공간에서는 강자일 수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룰에 의해 누구라도 죽이고 아예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 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신이 될 수 있었다.
어째서 서문조는 윤종우를 주목했던 것일까? 서문조는 윤종우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자기를 불쌍히 여긴다. 자기만 가엾이 여긴다. 여자친구인 민지은을 대할 때도 그런 태도는 그대로 드러난다. 누군가 자기 말을 들어주기만 바란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 게다. 하고픈 말이 많은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그것은 하소연이고 원망이고 어쩌면 분노이며 증오일지 모른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꽁꽁 감춰둔 말들은 때로 썩어 독이 되기도 한다. 윤종우가 유독 고시원 사람들의 살의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동종증오였을 것이다. 윤종우야 말로 누구보다 그들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서문조는 윤종우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또다른 이면이었다.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문조가 살인을 저지르고 윤종우가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윤종우가 살인을 저질렀어도 서문조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현실이 지루하기에.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기에. 어떤 희망도 가지지 못하기에. 어떤 기대조차 가지지 못하기에. 차라리 다 부숴버리고 싶다. 그런 충동들이 집단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파시즘이란 것이다. 다 죽여버리자. 다 부숴버리자.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그런 모습들을 더 흔히 발견하게 된다. 네티즌이란 이름으로 떼로 몰려다니며 다른 사람의 신상을 캐고, 그 사람을 찾아가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수많은 익명들 사이에 묻혀 지워져 버릴 것만 같다.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이다. 아무도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친다.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들이기에. 기껏 여성에 대한 도착적 성벽을 위해 페인트를 묻히고 화장실에서 스타킹이나 훔치는 주제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에 의해 제압당한 희생자 앞에서는 절대적인 존재로 돌변한다. 총기난사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의 심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다.
통쾌했을 것이다.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대들이었으니까. 무척이나 싫고 불편했었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을 만큼 그들을 혐오하고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서문조의 지시에 의했든 어쨌든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살해해 나갔다. 직접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며 그들이 고통속에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꾼 게 아니다. 끄집어낸 것이었다. 하긴 보통 사람 같으면 여자친구 납치됐다고 직접 죽이겠다고 칼까지 들고 찾아가지는 않는다.
여전히 유효하다. 이 모든 것은 윤종우의 망상이다. 서문조도, 고시원 사람들도 모두 윤종우의 망상이 만들어낸 허상들이다. 죽었음에도 여전히 살아 돌아다니는 서문조처럼 모든 것은 윤종우의 망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인지 모른다. 너무나 거북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이웃들에 대한. 저들과 동류가 되고 싶지 않은 절박한 거부감과 공포에 의한. 그러므로 자신이 저들을 등지고 떠나든, 아니면 저들이 자신을 떠나게 하든. 마음속에서도 아마 수 십 수 백 번은 죽이지 않았을까.
정글과도 같은 가혹한 현실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살기 위해 죽이고 죽이기 위해 죽인다. 짓밟기 위해 죽이고, 죽이고 나서도 다시 짓밟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윤종우에 대해 회사동료들이 경찰에 증언한 내용이란 윤종우가 고시원 사람들을 말하던 것과 얼마나 크게 다른가. 이웃이지만 타인이고 타인이기에 모두는 적이고 공포일 수 있는 것이다. 지옥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동료경찰이 위험한 상황일지 모르는데 규정을 이야기하며 쉽게 물러나는 동료경찰들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를 너무나 쉽게 함부로 하는 회사동료들을 보면서. 정작 민지은 자신도 피해자일 수 있는데 뒤에서는 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나 쉽게 한다. 그렇게 그들도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모두가 서로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이 일어난 공간이 외부로부터 단절된 고시원일 뿐.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며 본 드라마였다. 오히려 호러라기보다는 현실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드라마처럼 여겨졌다. 갈수록 조금씩 미쳐가는 임시완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이동원은 처음부터 그 표정 그대로 미친 놈을 연기하고 있었다. 사람이 미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인가? 세상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처럼. 묵직한 것이 걸리듯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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