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을 것이다. 주 52시간 도입 이전 잔업에 야근에 주말근무까지 일상으로 해야 했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부모보다 직장상사를 더 오래 보고, 배우자보다 직장동료와 더 자주 같이 있게 된다.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영자 작업반장이 유진욱 부장을 오빠라 부르고, 송영훈 차장에게 자신을 누나라 부르는 모습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유진욱의 아내가 아픈 것도 알고 있고, 송영훈의 가정사정까지 모두 꿰고 있다. 서로가 결혼하고 아이 낳는 모습까지 오랜 세월 함께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구내식당에서 밥하는 할머니인 정할머니가 어떻게 청일전자까지 오게 되었는가. 정할머니에게 청일전자란 어떤 의미인가. 정할머니가 빈 자리를 남은 직원들도 함께 느낀다. 서로의 빈 자리를 느낄 만큼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 있다.
마치 가족처럼. 다른 직원들과 달리 최반잔이나 유부장이 도망간 사장에 대해 생각하는 감정이 남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도망쳐서 숨어지내는 사장의 머릿속에도 틈만 나면 회사에서의 수많은 일상들이 스쳐지나고 있다. 회사가 사실상 삶의 전부였었다. 아내와 자식마저 실망하고 떠날 정도로 그는 회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 그렇게 익숙한 자신들의 직장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나 판타지다. 그래서 회사의 진정한 주인을 회사를 삶의 터전으로 여기는 직원들 자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밉상이지만 하은우 과장의 캐릭터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속물이다. 하지만 너무 전형적이라 한 편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마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저렇게 되면 안 된다. 공장노동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멸시와 혐오가 있다. 더불어 대기업에 대한 본능적인 동경을 가지고 있다. 직장은 단지 수단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징검다리다. 같은 직장동료마저 도구로 수단으로 여긴다. 남들처럼 번듯한 대기업에서 대우받으며 높은 연봉 받고 다니기 위해서. 자신같은 사무직이 생산일을 하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치욕이다.
사실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하은우 과장의 생각이 반드시 틀렸다 볼 수 없다. 어차피 월급쟁이인데 어째서 자신이 회사에 대한 사명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가.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일 뿐인데 가족같은 유대를 느껴야 한다는 것인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다만 밉상인 이유는 그런 속내를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 구지나와 그래서 커플을 이룬다. 다만 이들 캐릭터를 통해 작가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냥 판타지로 끝날 것인가. 아니 솔직히 지금 같아서는 이후의 전개나 결론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청일전자는 살아나고 이선심은 사장으로서 자리잡게 될 것인가. 아직 사장다운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해낸 것이 없다. 회사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대기업인 TM이 저리 적대적으로 나오는 이상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술이 있어도 고작 중소기업에 불과한 청일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일본드라마라면 갑자기 회사 연구실에서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회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을 테지만. 하지만 역시 드라마의 주제는 그런 비즈니스보다는 청일전자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군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일 테니. 서로 다른 이유로 청일전자를 직장삼아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전히 답답하다. 아마 그것이 선뜻 즐겁게 드라마를 보게 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뭐라도 이번에는 나아지는 것이 있을까. 아무거라도 기대할 만한 것이 있을까. 위기의 연속이고 좌절의 연속이다. 한국 중소기업의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그나마 이선심이 사장으로서 아주 미미하게 자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예고편을 보아 하니 사장도 돌아올 모양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 그러면서도 인간을 버티고 일어서게 만드는 그 끈끈한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딱 청일전자 정도가 적당하다. 서로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구분없이 함께 부대낄 수 있다. 그래도 역시 기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기다려 본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령을 잡아라 - 지하철이라는 일상의 공간과 비일상의 범죄들 (0) | 2019.10.22 |
---|---|
모두의 거짓말 - 점점 더 알 수 없는 수렁, 유인당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0) | 2019.10.21 |
모두의 거짓말 - 불안하고 위태로운 이유영의 매력 (0) | 2019.10.14 |
청일전자 미쓰리 - 아주 느린 조금씩의 성장, 저마다의 일상과 군상 (0) | 2019.10.12 |
타인은 지옥이다 -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 그리고 인간이라는 타인 (0) | 2019.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