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 - 갑과 을을 넘어 신뢰와 공존으로, 판타지인 이유

까칠부 2019. 11. 8. 06:58

원래 사람은 받은 만큼 일하는 것이다. 쥐꼬리만큼 받으면 쥐꼬리만큼 일하고, 태산만큼 받으면 태산만큼 일하고, 그 대가라는 것이 반드시 돈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일하는 이유. 내가 일할 수 있는 이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일해야만 하는 이유.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진짜 쥐꼬리 반만한 월급 받아가며 매일같이 야근에 주말까지 출근해 일하면서도 전혀 힘든 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전 한 세기 전의 일이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그만큼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직장인의 판타지다. 그곳에 사람이 있고, 보람이 있고, 그래서 내 수고와 열정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지만 결국 깨닫게 된다. 그런 건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중소기업일수록. 차라리 사람과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때로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마저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서로 쉽게 기대고, 그래서 서로 쉽게 요구하게 되며, 그리고는 쉽게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실망이 모여 불신이 되며, 그 불신은 다시 서로의 위치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오사장의 직원들에 대한 불신과 직원들의 오사장에 대한 불신이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처럼. 그런 점에서 차라리 서로의 거리가 적당한 대기업이 개인들에게는 더 낫지 않을까.


정이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서로 공유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알량한 인정을 대가로 그 이상을 받아내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이 아닌 착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공존하고자 할 때 정은 서로를 이어주는 끈끈한 매개가 되어 준다. 의리란 그같은 공존에 대한 확신이지 대책없는 인정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건 그냥 어리석음이다.


결국은 무조건적인 신뢰였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에. 너무 몰라서 아무렇지 않게 쉽게 물들어버리는 어린 신입이었기에. 그래서 의심할 순간에도 믿었고, 실망할 순간에도 그냥 믿어 버렸다.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회사의 동료들을. 원래 선배였고 상사였던 이들을. 그런 믿음이 회사에 그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혹시나 이번에는 배신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오사장 역시 회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회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되살렸을 것이다. 회사만 오로지 바라보다가 직원들의 얼굴을 마주보게 된다. 자기 혼자 살린 회사가 아니다. 자기 혼자 살려야 할 회사가 아니다. 단지 월급을 주는 직원이 아닌 동료이고 동지들이다. 


아무튼 초반 너무 답답하기만 하던 것이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음놓고 지켜볼 수 있다. 그래도 다음에는 무언가 풀리지 않을까. 더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이 있지 않을까. 아무리 절망적일 때도 드라마니까 그저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다. 그래야 한다. 현실은 결코 희망적이지만 않다. 그래서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