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라이브와 퍼포먼스 - 립싱크에 대해서...

까칠부 2010. 3. 11. 14:46

어제 - 아니 오늘 새벽이구나. 라디오스타를 보는데 클론이 나왔었다. 신정환이 클론을 공격하는데,

 

"다른 가수들은 공연 전에 목부터 푸는데 클론은 목을 푸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아마 그 전일 테지만 클론에게 라이브를 시키며 서툰 모습을 가지고 웃음거리로 삼기도 했었다.

 

문득 생각했다. 과연 클론이라는 팀이,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저리 웃음거리로 취급받을 만큼 허접한가.

 

아마 어느 정도는 기억에 의해 미화되었겠지만 내 기억 속의 클론은 단연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팀이었다. 어찌되었든간에 클론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신이 닜다. 신명이 넘치는 클론의 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히트곡 "꿍따리샤바라" 그대로 울적한 마음이고 고민이고 다 사라져 버리고 어느새 그들의 춤에 녹아든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클론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김건모의 가창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클론만큼 신명을 전할 수 있을까? 신승훈의 발라드가 아무리 애절해도 그것이 클론을 대신할 수는 없을 터였다. 과연 그것을 단순히 노래를 못한다고, 혹은 라이브를 해야 한다고 포기해야 한다면?

 

아마 노이즈였을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인지 갑자기 방송 3사에 라이브바람이 불면서 댄스그룹이던 노이즈 역시 라이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자니 숨은 딸리고, 안정적인 발성이 되지 않으니 목소리도 갈라지고, 춤까지 그냥저냥 흐트러져 버리고... 참 서글펐다. 저게 바로 그 노이즈란 팀이던가?

 

노이즈라면 그래도 90년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단한 댄스그룹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화면에 비친 노이즈는 노래도 못하고 춤도 안되는 그저그런 존재에 불과했었다. 초라하고 애처로웠다. 아니 웃음까지 났다. 과연 라이브라는 것이 노이즈같은 훌륭한 댄스그룹마저 그리 무존재로 만들 만큼 대단한 것이던가.

 

가수는 목으로 노래한다. 연주자들은 악기를 통해 음악을 들려준다. 댄서는 몸으로 음악을 표현한다. 퍼포먼스란 음악을 몸으로써 표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과연 가수의 목과 연주자의 악기와 어느 것이 위인가? 그리고 댄서의 퍼포먼스는? 어떤 음악들은 퍼포먼스가 곁들여져야 그 맛이 산다. 어떤 음악들은 또한 바로 그같은 퍼포먼스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굳이 퍼포먼스를 희생해가며 오로지 라이브를 추구할 이유란 무엇인가.

 

마이클 잭슨도 그래서 투어 도중 격렬한 안무가 필요한 무대에 대해서는 주저없이 립싱크를 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마돈나 역시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립싱크를 한다. 그리고 관중들은 기꺼이 그 립싱크를 들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무대를 감상한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므로.

 

오로지 귀로 들리는 것만이 음악이라 여기는 것은 얼마나 오만하며 천박한 인식인가. 귀로 들리는 음악 외에도 눈으로 보이는 음악도 있는 것이다. 잘 만든 뮤직비디오는 오히려 잘 만든 음반보다도 더 훌륭한 음악을 보여준다. 잘 꾸민 무대는 잘 만든 음악과 음향보다도 더 멋진음악을 보여준다. 아니 노래가 있기 전에 아마 춤이 먼저였을 것이다. 먼저 춤으로서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고서 그 다음에 목소리가 더해졌을 것이다. 인간이 노래를 부르기 전부터도 춤이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것이 가수의 목소리여야만 하는 까닭은?

 

얼마전 티아라의 "너때문에 미쳐" 무대를 보고 라이브를 가지고 문제삼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었다. 솔직히 한참을 웃었다. "너때문에 미쳐"는 라이브를 듣자는 음악이 아니다. 물론 라이브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음악의 방점은 바로 그 무대에 있었다. 그리고 "너때문에 미쳐"의 무대는 그 음악에 맞는 매우 완성도 높은 훌륭한 것이었다. 취향의 차이를 떠나 그 자체로만 보았을 때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라이브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마도 저 훌륭해졌을 터이고. 그런데도 여전히 더 나은 라이브만을 요구하는 것은... 과연 그 더 나아진 라이브라는 것이 지금의 티아라가 보여주고 있는 "너때문에 미쳐"의 무대의 완성도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겠는가. 티아라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무대의 퍼포먼스라는 것이 고작 노래 조금 더 잘 부르는 것보다도 가치없는 것이던가.

 

물론 라이브도 하고 퍼포먼스도 보여주고... 좋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다. 저 마이클잭슨도 자신의 무대를 모두 라이브로 채우지는 못했다. 보여주기 위한 음악에서는 과감히 라이브를 포기하고 보여주는 데에 전념했다. 그러면 마이클 잭슨의 그같은 무대는 라이브를 들려주지 못했으니 퍼포먼스의 완성도마저 가치없는 것이 되어야 할까?

 

라이브와 퍼포먼스, 할 수만 있다면 둘 다 충족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라면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는 것도 자신을 표현하는 한 수단으로서 존중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라이브와 퍼포먼스가 서로 양립할 수 없을 때, 혹은 그로 인해 보다 중요시 여기는 어느 한 쪽을 희생해야 할 때, 보다 높은 완성도를 위해서 다른 한 쪽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라이브를 위해 퍼포먼스를 포기할 수도 있고, 퍼포먼스를 위해 라이브를 포기할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음악이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니까. 음악이란 음악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대중에 건내는 언어이기도 하다.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그것이 과연 오로지 귀에 들리는 음악 - 노래여야만 하겠는가. 오히려 라이브보다 더 나은 수단이라 여겨진다면 퍼포먼스도 충분히 라이브 이상의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티아라가 부르는 "너때문에 미쳐"의 라이브도 분명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 아니 솔직히 음원으로 듣는 이상으로 "너때문에 미쳐"가 보여주는 완성도른 매우 훌륭한 것이다. 차라리 라이브를 포기하고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더 높인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이 아쉽다. 그랬다면 취향의 차이를 넘어서 티아라의 무대를 감탄하며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가수로서의 신승훈과 김건모의 역량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클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의 역량마저 그들이 대신할 수 있는가. 신승훈과 김건모가 들려주는 노래에는 못 미치지만, 그러나 신승훈과 김건모 역시 클론이 보여주는 무대에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클론이 더 낫다고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클론이 그렇게까지 무시당할만큼 떨어지는가?

 

어차피 라이브라고 AR 깔고서 반 립싱크로 부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AR로 노래의 부족함을 가리고 단지 눈속임으로 하는 라이브다. 어쩔 수 없다. 퍼포먼스가 그리 격렬한다. 그럼에도 그것도 라이브라고 퍼포먼스를 희생하고. 그렇다고 라이브를 하기에는 퍼포먼스를 포기할 수 없고.

 

차라리 아예 립싱크를 하고 퍼포먼스에 전념토록 하는 만 못하지 않겠는가. "너때문에 미쳐"와 같은 무대를 라이브 때문에 희생해야 한다면. 카라의 "루팡" 역시 라이브에 대한 부담 없이 오로지 무대퍼포먼스에만 전념했다면 과연 어떤 무대가 되었을까? 라이브만이 그리 중요하다면 아예 퍼포먼스 빼고 보컬그룹을 즐기던가.

 

어차피 걸그룹이라는 게 - 아니 아이돌이라는 게 2AM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퍼포먼스를 위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퍼포먼스란 이미 그들의 일부나 다름없다. 라이브를 듣고 싶으면 라이브를 위주로 하는 팀이나 개인의 음악을 듣던가. 퍼포먼스를 함께 보여주는 팀에 라이브를 요구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가수라는 말이 가져오는 착각이다. 내가 그래서 가수라는 말을 언제부터인가 무척 싫어하게 되었다. 음악인에는 연주인도 있고 래퍼도 있고 지금까지 말한 퍼포먼서도 있다. 가수란 그런 다양한 카테고리 가운데 목소리로서 음악을 표현하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말하지만 춤도 음악이다. 아니 노래보다 더 오래된 표현양식이 춤이었다. 아직 언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도 인간은 춤으로 언어를 대신하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목소리로 불리워지는 노래만이 음악인 것인가. 인간의 목소리로 불리워지는 노래가 춤에 우선하는 것인가.

 

립싱크가 사라지고, 퍼포먼서에게조차 라이브를 요구하는 현실을 보며 생각케 된다. 나도 전에는 꽤나 립싱크를 싫어했지만 클론과 같은 훌륭한 퍼포먼서들조차 라이브를 이유로 비웃음당해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클론의 춤이란 그렇게나 가치가 없던가. 그러나 당시 함께 흥겨워하던 그것은 진심이었다는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악기연주로서 음악을 표현한다. 노래를 하는 사람은 자기 목소리로서 음악을 표현한다. 프로듀서는 음반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반을 통해 역시 자기를 표현한다. 춤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 또한 음악을 표현하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므로. 과연 앞으로도 클론과 같은 훌륭한 퍼포먼스 그룹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가능성은 물론 충분하지만 라이브에 대한 일방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퍼포먼스도 아트다. 그래서 퍼포먼스 아티스트라 한다. 그리고 퍼포먼스 아티스트란 또한 음악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라이브만이 음악이 아니라. 어설프게 훌륭한 라이브보다 남다른 탁월한 퍼포먼스야 말로 더 훌륭한 음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상식일 테지만.

 

설마 내가 립싱크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월이 무상하달까? 그러나 립싱크가 만연해 있던 당시나, 립싱크가 아예 금지되다시피 한 지금이나 정상을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라이브만이 음악의 전부는 아닐 텐데도... 어쩌면 그리 시간이 흘러도 바뀌는 것이 없는지.

 

훌륭한 라이브만큼이나 훌륭한 퍼포먼스도 훌륭하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조금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