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로스포츠는 꿈이다. 환상이고 낭만이다.
사실 프로구단 하나 이기고 지는 것이 내 삶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야구단이 이겼다고 돈 더 잘 벌리는 것도 아니고, 축구팀이 졌다고 연애에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경기는 시작되고 승패는 갈린다. 그런데도 그 별 의미도 없는 승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팀은 팬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그 모든 과정이 팀의 역사이며 팬의 역사다. 이기면 이겨서 지면 져서 그렇게 환호하고 실망해 온 과정과 관계들의 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기기를 바라고 모든 팀들 가운데 정점에 서기를 꿈꾼다. 일상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을 팬들에게 현실을 대신한 열망이기도 하다. 팀과 일체가 되어 현실에서 가져보지 못한 도전과 성취감을 함께 맛보게 된다. 그래서 패배하는 동안에도 현실을 인내하듯 승리를 꿈꾸며 그들은 여전히 팬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꿈을 꾸기 위해서 모두가 겨울의 추위에 움츠러든 사이 경기장 뒤 프론트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수를 보강하고, 팀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욱 강화시킨다. 더할 것은 더하고, 덜어낼 것은 덜어내면서 다음 시즌 또 한 번 팬들을 위해 꿈을 이루어 줄 준비를 마치게 된다. 거기까지가 단장의 시간이다.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 그리고 나면 그때부터 실제 경기를 뛰는 선수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선수와 관중이 함께 꿈을 향해 나가는 시간이 이어진다. 백승수 단장의 한 마디 대사야 말로 그 모든 과정들을 압축하고 있을 것이다. 날이 따뜻해지면 단장의 시간은 끝난다. 선수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거치며 꿈은 이루어져간다.
차라리 백승수 단장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꾸는 꿈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조금 허무맹랑하기는 하다. 너무 드라마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래서 드라마이고, 그래서 프로스포츠인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다음 시즌을 준비했으니 한국시리즈에서 최강의 팀과 정상을 다투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 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모두가 약속한 최고의 성적을 내고 그 결과 모두가 꿈꾸던 가을야구를 시작한다. 그 경기장에는 선수들에게도 익숙한 팬들도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백승수 단장은 그를 뒤로하고 새로운 꿈을 시작하려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죽어도 팀세탁은 못하겠다는 이세영 팀장의 한 마디였을 것이다. 내가 더이상 프로야구를 보지 않게 된 이유도 비슷하다. 팀세탁까지는 아니었어도 해태 타이거스만의 빨갛고 까만 유니폼이 기아의 유니폼으로 바뀐 순간 더이상 같은 팀이 아닌 듯 여겨지고 있었다. 아무리 경기를 지켜봐도 이 팀이 그동안 내가 응원했던 그 팀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선수가 같아도 그런 사소한 차이로 인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팀과 멀어진다. 그만큼 열정적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서울토박이로 지역연고와 상관없이 응원하던 팀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하물며 연고지가 바뀌고 팀의 역사까지 단절되었다. 팀의 역사가 끝나고 아예 새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랜 팬들의 입장에서 어떻겠는가.
고단한 일상을 살던 이세영 팀장의 아버지가 야구장을 찾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에게 야구란 어떤 의미였는지. 이세영 팀장에게도 야구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만년 꼴찌 팀의 운영팀에 있으면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좌절의 시간들을 어떻게 극복해 왔었는지. 팬들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승리의 기쁨을 함께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견뎌낼 수 있었다. 따뜻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그들을 여전히 견딜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 선수들과 팬들의 마음처럼.
아무튼 누가 봐도 탐나는 인재일 것이다. 프로팀 단장으로만 끝내기에는 그 수완이 너무 뛰어나다. 요사스런 말재주라는 말 그대로, 제갈공명의 주머니라는 평가 그대로, 그냥 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독하게 잘한다. 싸가지가 없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그 나름의 방식일 것이다. 이것저것 너무 눈치를 보다가는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한다. 백승수 단장 역시 프로란 것이다.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성적을 내야 하는 프로선수처럼 그 역시 모두의 원망을 사더라도 결과를 내야만 한다. 그에게는 그런 인간의 따뜻함조차 프로로서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으로 바뀌고 만다. 그의 새로운 도전은 과연 무엇일까.
한 번 더 견뎌보기로 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대로 한 번 큰아버지이자 자신의 고용주인 회장의 방식에 맞추며 버텨 보고자. 원래 그런 때가 있다. 이미 마음이 결정되었음에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상대와 자신을 시험해 보려 한다. 그래서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버텨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가는 것이고, 아니면 마음이 가는 대로 끝장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시험하듯 백승수도 시험해 보았을 것이다. 백승수는 거울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비춰 보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었다. 백승수가 지금의 시련마저 이겨낸다면 자신도 그럴 수 있다.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정확히 그들은 원래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마치 동질감처럼.
차라리 앞으로 얇아지게 될 월급봉투를 선택한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야 아들이니까. 답답해하고 그래서 화내면서도 그러나 그를 이해하게 된다. 아니 벌써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좀 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장 통쾌한 순간이었다. 차라리 드림즈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보다 더. 어딜 가든 자신의 실력으로 한 자리 차지하지 못할까. 아무곳에서든 자신의 능력으로 뭔들 못 해낼까. 그러나 역시 여전히 백승수를 대하는 말투가 싸가지없는 건 싸가지없는 백승수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긴 이야기의 끝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그들은 오래도록 아주아주 행보하게 살았습니다'란 상투적인 문장일 것이다. 설사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모두가 잘 풀려서 기쁘고 즐겁게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내가 알고 내가 모르는 나와 인연이 있었던 모두가 그렇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해피엔딩이 좋은 이유다, 해피엔딩이야 말로 모두의 꿈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펭수의 시간은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지나가는 여백과 같았을 것이다. 구단의 모기업이 바뀌고, 단장도 나가고, 그리고 새로운 시즌은 시작된다. 웃고 떠드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도둑처럼 시간은 지나가게 된다. 재미있었다. 팀의 이름처럼 꿈과 같은 시간이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오랜 기억들을 떠올린다. 경기 하나에 웃고 울며 밤을 지새던 그 시절의 기억처럼.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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