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덕분에 3대 기타리스트라는 말이 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말들도 많다. 어떻게 3대 기타리스트냐. 김태원이 과연 3대 기타리스트냐.
하긴 지인은 3대가 아닌 4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백두산의 김도균, 시나위의 신대철, 부활의 김태원, 여기에 신대철의 친구이기도 했던 카리스마의 이근형. 이근형은 이후 신성우와 팀을 짜 데뷔시키기도 한다. 신성우 데뷔 초기 뒤에서 김태원 비슷하게 생겨서 기타치는 안경쓴 아저씨가 이근형이다.
부산 출신들은 따로 신대철과 김태원 대신 스트레인저의 임덕규와 디오니서스 배재범을 넣기도 한다. 특히 배재범은 하프피킹을 이해하는 사람은 전세계에 잉베이 맘스틴 말고는 자기밖에 없다며 큰소리치곤 하던 국내 최고의 속주실력을 자랑하기도 했었는데, 그러나 스트레인저나 디오니서스나 워낙 마이너한데다가, 또 락씬의 끝물에 나타난 탓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는 한계가 있었다.
하긴 이근형이 3대 기타리스트에 꼽히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작은하늘이나 카리스마나 나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있었지만 워낙에 마니너한 그룹들이라. 신성우와 함께 활동할 때도 신성우의 이름만 알았지 이근형의 존재까지는 대부분 몰랐다.
사실 당시까지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이 많았다. 60년대 신중현을 1세대로 놓는다면 70년대 주로 클럽무대를 중심으로 많은 실력있는 기타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지금도 기타세션은 거의 이 분이 맡는다는 함춘호옹과 기타의 신 이중산, 김광석, 그리고 요즘 예능에 나와 웃겨주는 유현상이 그들이었다.
유현상 하면 아마 기타리스트로서보다는 보컬로 더 유명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클럽무대에서 최고의 개런티를 받던 팀이 라스트찬스였는데, 그 라스트찬스에서 17살 때부터 기타를 쳤던 것이 유현상이었다. 나중에는 윤시내 등과 함께 한 사계절에도 몸을 담았었고, 솔로데뷔를 위해 언더그라운드 클럽무대를 떠나기까지 유현상은 기타리스트로서 명성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했었다고 하더라는 것은 내가 확인한 바 없기 때문이다. 나와는 세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 아마 김태원이 유현상의 기타를 두고 쇠고기로 치면 수입쇠고기와 같다 한 것도 주로 해외 커버곡을 위주로 공연하던 당시 클럽무대의 성격상 유현상의 말처럼 해외 유명 기타리스트들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하다 보니 그리 되었던 듯. 나도 유현상의 기타를 한 번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함춘호야 유명하고, 이중산도 서태지를 신대철에게 소개한 것으로또 유명하다. 당시 서태지 - 정현철을 발굴해 데리고 있던 것이 이중산이었는데, 어느 공연에선가 그것을 본 신대철이 달라고 해서 서태지를 넘겨주었던 것. 어디서 무얼 하는지 락씬에 뭔 일만 있으면 나타나 한 몫 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래서 한국 락씬의 부흥프로젝트였던 Rock in Korea에도 참가해 즉석에서 세션을 하기도 했었다.
김수철의 등장은 한국 기타리스트의 역사에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미 명동성당에서 공연을 하기도 햇던 김수철은 사실상 한국 최초의 테크니션 기타리스트라 할 만 했다. 기타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다양한 퍼포먼스를 당시 이미 선보이고 함으로써 이제까지와는 달리 솔리스트로서의 테크니션 기타의 시대를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김수철은 이미 대학시절 밴드를 해체하고 기타리스트로서보다는 가수로서 주류음악계에 편입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이 김도균, 신대철, 김태원... 김도균은 대구 출신으로 언더그라운드의 중심이던 이태원 클럽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면서 당시 백두산의 결성을 추진하던 유현상의 눈에 들어 픽업된 예였고, 신대철은 신중현의 아들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유명했다고 한다. 시나위는 이미 신대철이 고등학교 시절 만들었던 밴드. 그 초대보컬이 바로 김종서였다. 김태원은 조금 변방으로, 사실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인근에 김태원보다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최소 세 명은 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대학에 진학해 자기 갈 길을 찾았고, 김태원만이 클럽무대로 진출했다가 The End로 언더그라운드에 데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샴페인에서도 자기보다 기타를 잘 쳤던 친구에 대해 김태원이 이야기 한 적 있었을 것이다. 김태원이 자랑한 소풍에서 다른 학교 대표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이와 관계가 있다. 김도균이 이태원 클럽무대의 정통을, 신대철이 신중현이라는 전설의 혈통을 계승했다면 김태원은 그야말로 잡초였던 셈.
물론 이들만이 전부는 아니어서 앞서 말한 이근형도 있었고, 부활 1집에서 김태원과 트윈기타를 이루었던 이지웅도 있었다. 이지웅은 부활 1집 이후 김태원과 대판 싸우고는 나가서 임재범과 더불어 외인부대 1집을 낸다. 들으면 알겠지만 외인부대 1집의 기타에서는 부활 1집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역시 김태원과 겨룰만한 뛰어난 기타리스트로 기억된다. 여기에 블랙홀의 주상균... 나는 주상균의 기타를 무척 좋아한다. 뭐랄까 주샹균의 기타에는 가슴을 헤집는 처절함이 있다. 김태원의 서정성이 관조에서 나온다면 주상균의 서정성은 치열함에서 나온다. 또한 뛰어난 테크니션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기타를 이전과 구분하자면 역시 잉베이 맘스틴을 빼놓을 수 없겠다. 기타리스트의 역사에 속주테크니션이라는 단어를 깊이 크게 새겨넣은 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는 당시의 세계의 젊은 기타리스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잉베이 맘스틴을 쫓아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 마치 곡예라도 하듯 기타리스트라면 공연 도중 무대 앞으로 나와 자신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과시하던, 그런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기타리스트가 대중적인 스타로서 3대기타리스트라는 타이틀까지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상 기타리스트가 전면에 나선 유일한 짧은 시기였달까.
지금이야 슬로우핸드로 돌아섰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태원 역시 뛰어난 속주테크니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3대 기타리스트였다. 당시 기타리스트에 대한 평가기준이란 얼마나 더 빠르고 테크닉이 화려한가였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셋 가운데 김태원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 아무래도 김태원의 강점은 중저속에서의 필이 충만한 멜로디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활 1집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속주로 정평이 난 "인형의 부활"을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빠르기야 "인형의 부활"이 빠르지만 김태원의 기타의 정수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있다.
사실 그런 점 때문에 또 저평가된 기타리스트가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이다. 김종진 역시 매우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며 테크니션이다. 아니었다면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김현식의 밴드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빠르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김종진의 기타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충실함이 있다. 다만 당시의 속주테크니션의 경쟁과는 전혀 다른 노선에 있었기에 평가가 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이 손무현, 이현석, 신윤철, 이들 세 사람 역시 김태원이나 신대철과 마찬가지로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스쿨밴드 등을 통해 언더그라운드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들 세 사람을 이전의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 세 사람보다 윗줄에 놓기도 하는데, 김태원 역시 이현석을 천재라 꼽고, 신대철도 동생 신윤철을 자기보다 낫다고 하는 등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손무현은 신해철과 동갑으로 신해철이 부활 쫓아다니던 시절 이미 공연세션을 뛰고 있었을 정도로 신해철로 하여금 농담 반으로 손무현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대학가요제로 도망쳤다 말하게 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쉽다면 손무현이나 이현석, 신윤철 모두 밴드기타리스트로서 밴드를 이끌었던 이전의 3대기타리스트와는 달리 전혀 다른 길을 갔다는 것이다.
손무현은 이승철, 윤상 등과 더불어 걸프렌드라는 밴드를 결성했다가, 김완선의 5집을 프로듀스하면서 완전히 대중음악으로 돌아서 버렸고, 신윤철은 밴드보다는 주로 세션으로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았고, 그나마 이현석만이 솔로기타리스트로서 음반도 내고 히트도 하면서, 그러나 밴드기타리스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하긴 80년대 말 대마초파동으로 락씬이 쑥대밭이 되고, 댄스음악 등의 젊은 음악이 주류음악계를 주도하면서 락씬 자체가 쇠락해 있던 때라 기타리스트로서 그들이 락씬에 버틸 여지는 없었다 할 것이다. 최근 신윤철은 동생 신석철과 더불어 서울전자음악단이라는 밴드를 하고 있긴 하지만. 가끔 신윤철과 신대철이 함께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면 그리 멋질 수 없다. 손무현과 신대철이 함께 연주한 동영상도 어딘가 돌아다니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대중들에 천재기타리스트의 한 사람으로 각인된 사람이 바로 김세황일 것이다. 김세황은 아마 토종이 아닌 해외파일 것이다. 부모님의 일 때문에 아마 미국에선가 있으면서 제대로 기타를 배웠다고 하는데, 기타실력도 기타실력이려니와 무대매너가 정말 화려하다. 신해철이 NEXT를 결성하며 김세황을 픽업한 이유가 기타실력보다는 그 무대매너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같은 기타를 쳐도 왠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기타를 친다. 요즘은 김세황의 기타를 보지 못해 모르겠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신중현은 그냥 전설이고, 함춘호, 김광석, 이중산, 유현상은 흘러간 전대고수, 그리고 김수철은 바로 직계선배로 그러나 강호를 뒤로 하고 관직에 몸담은 다른 길을 가던 반배분 위의 고수, 그리고 그 다음에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 등이 있었는데, 특히 이 가운데 당대의 최고 인기밴드를 이끌었던 이들로 대중들에 가장 인지도가 높았고 대표성이 있었던 이들로 3대 기타리스트를 꼽은 것이었다. 그 뒤로 후배인 손무현, 신윤철, 이현석, 김세황등이 있고. 그 뒤로도 뭐 최일민이라든가 박영수라든가 많이 있는데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고로.
즉 3대기타리스트라는 게 당시 가장 기타를 잘 치던 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대는 일단 빼고, 다른 길을 가는 고수도 빼고, 후배도 빼고, 또 동년배 가운데 당시 유행하던 속주테크니션으로서 대표성이 있던 백두산, 부활, 시나위의 3대 밴드의 밴드기타리스트로서 세 사람을 꼽았던 것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말한다. 김태원보다는 배재범이 낫지 않은가. 이근형이 실력은 더 있었다. 함춘호 옹이야 말로 최고의 기타리스트다. 김수철이야 말로 다시 나올 수 없는 천재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 가운데 대표성을 가진 세 사람을 꼽은 것이 3대라는 것이다. 실력이 아니라 상징성으로. 사실은 그냥 60년대 영국을 풍미했던 3대기타리스트 에릭 크립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을 흉내내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더불어 아마 당시보다 지금의 기타리스트들이 더 실력이 뛰어나다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지금 잉베이 맘스틴보다 더 빠르고 더 화려한 기타를 치는 기타리스트들이 꽤 많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기가 잉베이 맘스틴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있다."
선배에 대한 예우라는 것이다. 물론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이, 그 밖의 기타리스트들이 직접 후배들을 가르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그런 기타리스트들이 있었기에 후배들도 기타를 잡고 연습할 동기가 생겼을 것이다. 직접적으로야 영향을 주지 않았더라도 선배란 그래서 선배인 것이다. 과연 직접비교가 가능한가.
누구 말마따나 기타리스트라는 게 누가 더 잘 치고 못 치고 줄을 세우기보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영역이 있는 것이다. 부활의 음악에는 김태원의 기타가 최고인 것이고, 시나위의 음악에는 신대철이 없으면 안 된다. 자우림의 음악에서 이선규의 역할은 어떨까. 블랙홀에서 주상균은. 그렇게 보면 되겠다.
하여튼 지금에 와서까지 누가 더 기타를 잘 치네 못 치네, 3대기타리스트가 맞네 틀리네,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장 잘 치는 세 사람이 아니라 가장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고 상징성이 있던 세 사람이었다. 바로 그 시대 그 시점에. 단지 그것 뿐이었다는 것이다.
간만에 기억을 쥐어짜내려니 머리에 쥐가 내리려 한다. 차라리 날 잡아서 이리저리 자료 조사해가며 쓰면 훨씬 편하련만. 그러나 블로그질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단서가 있다면 자기가 알아서 조사해 알아가겠지. 나는 단서만 제공하면 그 뿐. 틀려도 역시 그 뿐. 자기가 알아서 알아갈 바라.
말하지만 여기 언급된 기타리스트가 전부는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만 이렇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이 어디 한둘일까. 단지 그 가운데 상징적으로 세 사람을 꼽으니 3대라 할 뿐.
과연 기타를 가지고 가장 뛰어난 세 사람을 고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치는 세 사람을 골라낼 수 있지? 누가 더 잘 치고 못 치고 다 부질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에 와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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