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느린 좀비에게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

까칠부 2021. 5. 8. 20:45

사람의 달리기는 자연에서 상당히 느린 편에 속한다. 아마 사람이 발로 쫓아가 잡을 수 있는 동물은 토끼보다 큰 종류 중에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최초에 발생한 아프리카 초원에서도 상당히 큰 초식동물들을 사냥하던 포식자였었다. 어떻게?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게 된 순간부터 몸에서 털이 사라지고 땀샘이 발달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오래 움직여도 그로 인한 열을 발산하기 유리한 구조란 뜻이다.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건 지구상에 오로지 인간 뿐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달리면서 발생하는 열을 조절하며 오래도록 달릴 수 있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당장은 네 발 달린 초식동물이 인간보다 빠를 수 있어도 조금만 오래 달리면 초식동물은 높아진 체온으로 인해 쉽게 지치고 인간은 여전히 그 뒤를 쫓아 달리게 된다. 그리고 초식동물이 더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추는 순간 사람은 그를 쫓아 잡을 수 있다. 아마 그래서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냥은 무리를 이루고 있을 때 더 효과적이다.

 

느려터진 좀비가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느려터졌는데 지치지 않는다. 사람은 벌써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데 느린 걸음으로 여전히 뒤쫓아 오고 있다. 그렇다고 제압도 쉽지 않다. 머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전혀 고통따위 느끼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공격해 온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인간이 최초 초원에서 초식동물을 사양하던 방식 그대로를 좀비들은 인간을 상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저토록 느려터진 좀비들에게 인간이 그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최초 발생한 소수 정도는 머리를 공격해 무력화시킬 수 있어도 그 이상 숫자가 늘어나면 그때부터는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긴장과 공포의 연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 마음을 놓으면 좀비의 공격으로 똑같은 좀비가 되고 만다. 그야말로 강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에 강하다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오히려 빠른 좀비보다 전통적인 느린 좀비가 아직까지도 여전히 공포스럽게 여겨지는 이유인 것이다. 피칠갑한 괴물보다 아무것도 없이 여닫는 문소리가 더 공포스런 이유와 같다. 한 방에 머리를 제압할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아니면 또다시 좀비만 하나 더 늘릴 뿐이다. 어쩌면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태초의 공포에 대한 기억이 그런 식으로 구현된 것은 아닐까. 물론 좀비가 실재한다면. 모든 건 설정의 세계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