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옥 - 진정한 '부산행'의 후속편? 누가 지옥을 만드는가?

까칠부 2021. 12. 4. 03:53

어쩌면 '지옥'이야 말로 연상호 감독이 생각한 '부산행'의 진정한 후속편이 아닐까. 보는 순간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만큼 비상하게 '지옥'은 오히려 '반도'보다 더 '부산행'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지금도 때때로 아주 어렸을 적 꾸었던 꿈을 떠올린다. 아마 주말에 방영하는 외화시간에 보았던 공포영화나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서 돌려보던 괴담책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 그런 꿈을 꾸게 되었을 것이다. 흡혈귀가 있었고 당연하게 사람들이 그 흡혈귀에 물려 흡혈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동네 친구도, 아저씨 아줌마들도 심지어 엄마와 아빠와 동생들마저 어느새 흡혈귀가 되어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검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던 동네 좁은 골목길이 야구장으로 바뀌고 나는 흡혈귀로 돌변한 가족, 친구, 동네 사람들에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오로지 내가 당시 업어 키우던 막내만이 나와 함께 끝까지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막다른 곳에서 숨어 있는데 눈앞에 흡혈귀가 나타나며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지금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따위의 말을 싫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때 꾸었던 꿈의 기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다른 사람들에 휩쓸려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습관 같은 것이 생겼다. 모두가 함께 떠드는 소리가 설사 옳다 해도 거기에 한 마디 보태는 것을 오히려 꺼린다. 혹시라도 모두가 하나가 되어 떠드는데 그 내용이 옳지 않다 여기면 아무리 욕먹더라도 일단 덤벼들고 본다. 타진요 때도 그랬고 이후로도 여러 이슈들에서 내가 일관되게 지켜 온 스탠스였다. 집단은 광기다. 집단이란 이름의 광기는 전염병과도 같다. 거부하고 물리치지 않으면 나 역시 감염되고 만다.

 

아주 뒤늦게 최초의 좀비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서 당시 내가 꾸었던 꿈에 대한 해석이 옳았음을 새삼 확인한 이유이기도 했다. 좀비란 그런 것이었다. 흡혈귀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전설이다'가 쓰여진 시기가 바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였다는 것이다. 역사상 최대최악의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과연 집단지성인가 집단광기인가? 인간은 지성의 존재인가? 광기의 존재인가? 그래서 '나는 전설이다'를 지배하는 정서도 바로 인간의 광기였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바로 그 광기에 의지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좀비물에서도 좀비에게 쫓기고 혹은 맞서는 인간들의 모습 역시 비상하게 좀비와 닮은 광기로 그려진다.

 

종교란 무엇인가? 연상호 감독은 작품에서 종교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작품에서 괴물들에 의한 예고된 죽음처럼 대부분 자연재해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어떤 인격적인 존재의 개입 없이 당연하게 자연의 법칙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직 무지한 상태에서 그런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현상들에 당위를 부여하고 개연성을 만들어 이해의 범위 안에 우겨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가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면 신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 신을 공경하고 신을 숭배하며 신에게 더 고귀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하게 신벌이 그를 고통받게 만들 것이다.

 

눈앞에 그 신벌을 받는 사람이 보인다. 누군가 그를 두고 정의라는 명분을 부여한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죽는다. 정의로운 사람은 살아남는다. 그 단순한 논리에 사람들은 현혹되기 시작한다. 현혹되는 것을 넘어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이를 단정하고 단죄하는 것에 열광하며 추종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두려워서, 누군가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어서, 누군가는 현실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래서 그로부터 벗어난 이들은 죄인이 되어 쫓기고 혹은 고난에 처하게 된다. 누가 지옥을 만드는가? 괴물들은 그저 몇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고작 일부다. 그러면 누가 더 인간을 고통스럽게 악으로 내모는가. 너무 침착하다. 너무 냉정하다. 그래서 광기다. 진심으로 믿어 버리는 맹목이고 확신이다.

 

정의로운 사람이 더 무섭다. 도덕적인 사람이 더 무섭다. 증류수처럼 한 점 의혹도 없이 정의와 도덕과 진실을 믿어 버리는 사람이 무섭다. 악한 사람은 고작해야 수 십 명이나 죽일 수 있을 뿐이다. 떼를 이루더라도 몇 백 명이나 죽일 수 있을까?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한 번에 수 천 수 만 수 십 수 백만의 사람을 죽이고도 한 점의 후회도 죄책감도 없다. 그런 정의로운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공산주의자라고 겨우 열 살을 넘긴 그 딸까지 집단으로 강간하고 죽이고 나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든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는 듣기가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어른들의 회고담이 참으로 적나라했었다. 누구 젖가슴을 칼로 도려냈다더라. 성기를 도려내서 전시했다더라. 집단강간으로 복수를 했다더라. 빨갱이니까. 공산당이니까. 적이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그래서 결국 드라마는 종교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그래서 증오인가? 어째서 그 수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남아 세계에 영향을 떨치게 된 것일까. 어떻게 불교는 동아시아 세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된 것일까?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이 자비다. 자신의 아이와 아내를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던지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고서 지옥은 끝나고 죽었던 이들까지 다시 살아난다. 천지는 무심하다지만 드라마의 신은 인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신의 구원에 매달리고픈 인간의 나약함이었을까.

 

인간은 어쩌면 침착해서 미쳐 있는지 모른다. 냉정해서 미쳐 있는지 모른다. 성실해서 미쳐 있는지 모른다. 근대가 인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다. 차라리 경솔하고 서툴고 게으른 사람은 사고를 쳐도 작게 친다. 인간이 악한 것은 인간이라서일까? 인간으로서 우월하다는 것은 반드시 선하다는 것인가. 선해서 정의로운가, 정의로워서 선한가. 어려운 문제다. 항상. 아마 인간은 어쩌면 영원히 그 답을 얻지 못할 지 모른다. 선이란 정의란 단지 과정일 뿐인 것을.

 

초반 3부까지와 후반 3부의 긴장감의 밀도가 상당히 다르다. 유아인의 존재감이었을까. 유아인이 사라지고 긴장감이 확 꺾이고 만다. 진짜 주제는 후반 3부에 있었음에도. 허술한 부분은 잊는다. 그 자체로 재미있다. 흥미로운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