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를 만들고 싶었다. 와인이 아니라 전통제법으로 만든 그 포도주다. 포도즙에 누룩을 넣거나, 아니면 밑술과 함께 포도즙을 섞어 만들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떠올렸다. 기존에 만든 술을 청주만 거르고 그 위에 포도즙을 넣으면 얼추 비슷하게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술을 만들고 남는 지게미가 무척이나 아깝게 여겨진 때문이었다. 지게미에 남들 하는대로 고기를 재웠는데 그 위로 청주가 떠오르는 걸 보고 내가 참 죄를 짓고 있구나 새삼 반성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최근 그 지게미만 모아서 다시 발효통에서 발효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서도 여전히 발효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진짜 내가 귀한 쌀들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었던 것인가.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지게미 재활용 겸 추가적인 재료 없이 술만드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기존에 잘 익고 있던 술통을 열어 위에 뜬 청주만 깔끔하게 떠냈다. 그리고 순간 깨달았다. 아, 이래서 문배주에 쌀과 누룩만 들어가도 문배향이 난다 그런 것이로구나. 진짜다. 위에 뜬 청주만 떠내니 이가 아프도록 단 맛과 함께 하나의 과일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뭐지?
워낙 배가 비싸서 먹어 본 지 오래라 떠올리는데 꽤 시간이 걸렸었다. 처음에는 참외인가 싶었었다. 아니 참외와도 닮기는 했다. 참외 과육이 아닌 씨가 있는 속부분의 그 단맛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상쾌한 느낌의 단맛이다. 너무 달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리고 말았다. 설탕을 넣어 단맛을 강조한 음료수 갈아만든 배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너무 달아서 이대로 먹기는 영 부대낀다. 고기를 구워 안주로 먹는데 하아... 대신 이걸로 고기를 재워 구우면 진짜 맛있기는 할 것 같다. 그러기에 너무 아까워 문제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과일향이 나는 단술이라는 게 꽤나 신기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숙성해 보자고 내압병에 넣어 바로 냉장고에 쳐박아 놓은 상태다. 저건 그냥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조금 더 술을 숙성해서 단맛을 죽여야 그나마 안주해서 먹을 수 있다. 지금 상태로는 탄산수나 보드카 넣어서 단맛을 죽이며 먹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도 내가 만든 술에서 이런 맛이 나오다니...
대충 원인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원래는 발효가 끝나면 바로 증류할 목적으로 만든 술이라 중간에 내가 추가한 한 가지 재료와 더불어 집안에서 가장 추운 곳에 놔둔 탓에 내부 온도가 15도 이하를 유지할 때가 많았다는 부분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내심 추측하고 있는 중이다. 이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저온발효가 아닐까. 그를 위해 술발효 전용 냉장고를 주문한 것이 아주 잘한 행동이라 스스로 뿌듯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술에서 배맛이 난다. 술에서 과일향이 난다. 과일은 넣지 않아도 순수하게 쌀과 누룩과 물만으로 발효된 술에서 진하게 과일의 맛과 향이 난다. 그냥 비유인 줄 알았다. 그런 느낌이구나 과장해서 말하는 것인 줄 알았다. 물론 누룩은 개량누룩이다. 개량누룩과 와인효모를 썼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결과지만 너무 기분이 좋다. 너무 달다는 것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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