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물을 적게 넣고 맥주 만들기, 맥주에 대한 아쉬움을 풀다

까칠부 2024. 9. 28. 19:39

솔직히 의도했다기보다 그냥 집안에 있는 양조도구들이 죄다 작아서 생긴 결과였다. 보리 500그램으로 맥주를 만들려는데 맥즙을 만들 냄비가 5리터도 채 되지 않았다. 대충 어떻게 되겠거니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 보리밥을 넣고 엿기름을 넣고, 낮은 온도로 5시간 이상 삭힌 뒤 단물만 시아주머니로 걸러서 홉을 넣어 한 번 끓인 뒤 발효를 시작했다. 물이 너무 적지 않은가. 실제로 적었다. 그래서 맛있었다.

 

맥주를 마실 때마다 항상 느끼던 불만이었다. 맛과 향이 좋다는 수입맥주를 먹으면서도 항상 아쉬웠었다. 너무 심심하다. 막걸리같은 묵직함이나 위스키같은 강렬함도 없이 먹고 나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맥주를 한동안 먹지 않았었는데. 물을 적게 넣고, 홉도 듬뿍 넣고, 양조용 냉장고로 12도 온도 맞춰서 3주 동안 발효했다. 물이 적으니까 발효도 오래 걸리더만. 3주 발효하고 이틀 병입해 놓았는데 탄산 터지는 거 겁나서 뚜껑 여는데만 20분 넘게 걸렸다. 그냥 터지더만. 그리고 다시 닭날개 오븐에 구워서 한 잔 하려니 입안에서도 터진다.

 

그러고도 잔당이 남아서 술이 무척 달다. 거의 막걸리 수준으로 찐득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홉을 아끼지 않고 때려넣어 씁쓸한 신맛이 무슨 귤주스 먹는 것 같다. 시트러스 홉을 써서인가 진짜 향도 맛도 귤껍질의 그것에 가깝다. 그리고 독하다. 500 조금 안되게 한 잔 따라 마시는데 절반 넘어가기 전에 벌써 알콜기가 올라온다. 오호... 그냥 안주 없이 이것만 먹어도 좋을 정도로 맛도 향도 괜찮다. 사실 사치스런 술이다. 홉만 거의 3천원 어치 들어갔다. 보리 500그램에 엿기름 150그램이면 원가만도 캔맥주 이상이다. 그런데 물을 적게 넣어 나온 양이 1.5리터가 전부. 하지만 또 그게 내 취향에 맞는다.

 

말하자면 맥주를 농축시킨 것 같은 맛이다. 단맛과 쓴맛과 신맛과 심지어 탄산까지도 찐득한 농도 만큼이나 압축되어 있다. 다음에 다시 만들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다만 시행착오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주면 충분하다 해서 그렇게 끝내려 했더니 맥즙 자체의 농도가 너무 높아 3주 넘게 발효를 하고서야 겨우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물을 조금 더 넣고 아예 3주 맞춰서 발효를 끝내야지. 아주 괜찮다. 생각보다 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