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백인이 사무라이 행세하는 영화나 만화들이 꽤 많이 있었다. 대부분은 막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전국시대 이전에도 백인이 일본으로 넘어와서 활약했다는 내용이 꽤 적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어떤 만화에서는 텐구가 사실은 표류해 온 백인이었다는 식의 해석도 내놓았었는데, 그게 다 일본인 작가들이 그린 내용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오래전 라이트로벨 가운데는 현대의 일본인 소년이 중세의 프랑스로 넘어가서 잔다르크가 되는 내용도 있었다. 심지어 그거 우리나라에서 번역해서 출판하기까지 했었다. 용랑전은 일본인 소년들이 중국 삼국시대로 건너가서 활약한다는 내용이었고, 오래전 미우라 켄타로의 초기작 가운데는 그렇게 일본인 소년소녀가 중세 몽골로 타임슬립했다가 칭기즈칸이 된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만나는 내용도 있었다. 아마 이케가미 료이치였을 텐데 일본인이 타임슬립해서 유비가 되는 내용도 있었다. 참 전적도 화려하다. 그런데 왜 흑인이 사무라이가 되면 안되는 것일까?
역사왜곡 핑계를 대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대부분 역사드라마나 영화, 만화, 소설들은 아예 처음부터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들이었다. 삼국지부터 역사왜곡으로 아예 범벅이 되어 있고,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작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역사를 알고 보면 한숨만 나오는 내용이 한가득이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역대급 시청률을 기록했던 허준 역시 정작 실제 허준의 스승이었던 앙예수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등 어이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었다. 그 전에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퓨전사극들은 그냥 역사왜곡을 넘어서 역사창작까지 서슴지 않는 것들이 거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잘만 보네. 오다 노부나가가 흑인노예를 선물받아서 과시용으로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실제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 흑인이 어찌 되었는가 자세한 서술이 없으니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 또한 충분하다. 아주 없는 이야기도 아닌데 지랄한다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본 역사에 흑인따위는 없다.
하긴 어찌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 당시부터 자신들을 아시아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히틀러로부터 명예백인이라 불렸던 그대로 자신들을 명예유럽인 정도로 여겼었다. 특히 일본에서 무대륙과 관련한 이야기가 꽤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이유였다. 원래 태평양에는 무대륙이라고 하는 백인들의 문명이 있었는데 무대륙이 사라지고 그 백인들이 흘러들어 정착한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무대륙의 전설 자체가 유럽인도 아닌 동아시아의 노랑원숭이들따위가 그같은 고도의 문명을 일찌감치 건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유럽 백인들의 인지부조화가 만들어낸 산물인 것을 보면 지극히 어울리는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백인은 몰라도 흑인은 안된다.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한국놈들도 꼴같잖기는 마찬가지다.
작가가 꼴리면 아더왕도 여자로 만들고, 삼국지의 인물들도 죄다 여자로 환생시키고, 나폴레옹이 근육질의 마초가 되어 주먹질로 유럽 열강을 때려눕히고 다니기도 한다. 역사에 없었던 여장남자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활약하기도 하고, 하필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생쥐스트와 어려서 헤어진 남매가 등장하기도 한다. 뭐 하여튼 많다. 그걸 다 따지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지금껏 그래왔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래서는 안된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려 해서는 안된다. 특히 백인이라면. 더구나 그렇게 대체하고자 하는 이들이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여자로 바뀌고, 심지어 우에스기 겐신은 아예 대놓고 게임에서 여자로 나오기도 하는데, 아니 게임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가 칼 들고 나가이 나가마사랑 맞다이뜨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만은 안된다면 그것은 어째서이겠는가?
말이 반PC지 명백히 말하면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과 배제다. PC가 과도한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와 같은 반동들이 모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흑인이라 거부하고 히스패닉이라 부정하고 성소수자라 배제하고,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고작 내가 보기에 거슬리니까. 다른 이유 없다. 그냥 내가 보기에 꼴같잖으니까. 세상에는 남성과 여성밖에 없고, 근대 이전에는 백인과 아시아인밖에 없었다. 물론 백인들 입장에서는 아시아인도 의미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로 가자. 내가 이른바 반PC에 극단적인 혐오를 느끼는 이유다. 원래 그랬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문제니까 바로잡자는 것이고 단지 방법론에 있어 아직 논쟁의 여지는 있다.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니까 원래대로 되돌리자. 전세계적인 추세이긴 할 것이다. 극단적인 혐오와 배제의 논리들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에 흑인이 등장하니 역사왜곡이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다? PC다?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흑인이 바이킹이 되기도 하고 중세에 기사로 나오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그런 것들을 인위적으로 비틀려 한다. 원래 그랬었으니까. 원래 안 그랬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최근 수 십 년 동안에는. 수 백 년 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사는 그냥 핑계다. 웃기는 것이다. 한심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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