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서 가장 놀란 캐릭터는 다름아닌 애순의 의붓아버지 염병철이었다. 당시 대부분 친아버지들도 딸을 고등학교까지 보내주고 그러지 않았거든. 심지어 1970년대까지도 가난한집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었다. 어렸을 적 바로 옆집 살던 친구의 누나들도 그래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해서 가족의 생계에 보태면서 남자아이였던 친구녀석만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했었다. 그런데 무려 1960년대에 서울도 아닌 제주도에서 친아버지도 아닌 의붓아버지가 어머니도 없는데 딸을 고등학교까지 보내줬다고?
더 놀라운 건 굳이 재혼한 자신의 아내를 설득해서 전남편의 딸을 데려와 같이 살도록 설득한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세대 이전까지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경우 평생 혼자 살며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가 다른 게 아니었다. 많은 남성들이 이미 결혼한 전력이 있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에도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친엄마가 재혼하게 되는 경우 아버지쪽 가족이 있으면 거기에 맡겨져 자라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부모가 재혼하고 자식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가정이라는 것은 대중문화에서도 꽤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설정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 애순의 엄마도 애순은 전남편의 가족들에게 맡기고 자기만 염병철과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었던 것일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닌 지금 남편이 전남편의 아이를 데려와 살게 하고,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보내주고 있었다. 이건 당시 기준으로 매우 보기 드문 미담으로 신문에 보도되어야 할 수준의 사건인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이미 이 드라마는 판타지가 되어 버린다.
일단 내가 아는 1960년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삶이란 것은 드라마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일단 친엄마의 새남편이 전남편의 딸인 애순까지 데려가서 같이 살려 하는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 어차피 없이 사는 형편에 자기 친자식도 아닌 죽은 형의 딸을 중학교나 보내주어도 형제간에 우애가 지나치다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친자식에게도 그렇게 안하는데 이미 이세상 사람도 아닌 형의 자식에게 그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그런 소리도 들을 만하다. 그러니까 아주 운이 좋아야 중학교나 졸업하고, 대부분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말았을 것이다. 참고로 시골에서 집도 있고 땅도 있고 배도 있으면 부자 아니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도 시골에 땅 많이 있고 배도 있다고 도시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괜히 사람들이 땅팔고 집팔고 배팔아서 도시로 떠나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산업화시대에 도시에서 생산한 공산품을 소비하기에는 일차산업의 생산력이란 한참 모자른 것이다.
아무튼 그러면 초등학교랑 중학교 졸업했으면 무엇하는가? 바로 위에도 썼을 것이다. 바로 식모든 잡일이든 공장이든 돈을 벌러 나서야 했다. 지금처럼 학교 졸업했다고 백수로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 당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으면 염병철처럼 마누라라도 잘 만나야 했다. 여성은 더욱 결혼이 중요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애순처럼 적당히 집안일이나 돕다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동네 청년과 일찌감치 결혼해서 정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었다. 단, 그것은 원래 살던 동네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경우에나 그랬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학교도 다니지 않는 여자아이에게 딱히 맡길 일이라는 게 집안일 정도였던 터라 결국에 일찌감치 돈을 벌러 도시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리봉동 벌집방들이 바로 그렇게 집을 떠나서 돈을 벌러 도시의 공장에 취직한 여자아이들이 모여살던 곳이었었다. 진짜 겨우 몸이나 누일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방에 혼자도 아니고 둘셋씩 방세도 나눠 내면서 거의 잠만 들어와 자고 하루종일 나가 일만 하는 것이 당시 어린 여공들의 삶이었었다.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사셨으니 당시에는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일 터였다. 아마 애순도 염병철같은 좋은 새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부산까지 가서 가발공장에라도 취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엄마처럼 일찌감치 잠녀로 나섰거나. 그게 당시에는 일상이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반복된다. 어려서 누구를 좋아했고 사랑했고 사귀었든 일단 다른 지역으로 가서 매일같이 하루 12시간 넘게 휴일도 없이 일하다 보면 그런 감정같은 간 자연스럽게 잊히기 쉽다. 그래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 동네로 돈을 벌러 와서 매일 외롭게 고단한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그런 꿈같은 낭만보다는 가까운 현실을 찾아 안주하려 하게 된다. 겨우 성인이 된 나이에 오다가다 만난 주위의 남성과 일찌감치 식도 없이 바로 살림부터 차리고 보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였다. 그나마도 딸린 식구가 없는 경우에나 가능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경우는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도 못하고 일만 하다가 늦게서야 거의 주위의 강요와 의무감에 선을 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랑보다는 현실이었고 의무였다. 당연하게 나이가 차면 배우자를 찾아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과 결혼부터 해야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의 결합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 결혼이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그렇게 만나서 결혼하게 된 배우자도 사정이 뻔한 터라 결혼했다고 갑작스럽게 사정이 달라지는 경우는 없었고, 따라서 대부분 여성들은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돈을 벌러 나서야 했었다. 매일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오랜 노동에 정신적으로 지치기 쉬운 그런 환경에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기대했던 그런 행복하고 평온한 가정을 느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 주위의 어른들을 보더라도 아주머니들은 거의 항상 얼굴에 멍을 달고 살았었다. 아예 모두가 보는 가운데 길 한복판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그러면 아주머니들도 지지 않고 온갖 험한 말을 내뱉으며 마구 악다구니를 쓰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당연하게 아이들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결혼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가지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면 그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휴일에조차 아이들이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일도 거의 없을 때가 많았다. 부모들은 대부분 새벽이면 일어나 일을 나가야 했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벌써 늦은 밤이었던데다가, 더구나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 아이들은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부모가 아닌 동네에, 그것도 아이들과 같은 시간에 거리를 헤매는 어린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만 했었다. 내가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이 했다는 욕설을 듣고는 그럴만했구나 대충 흘려듣고 말았던 이유였다. 나도 2층집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부모로부터 다시는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터라. 동네에서 친구들과 하던 그대로 친구네서도 말했더니 아주 기함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는 그마저도 굉장히 착하고 순하기만 한 것이었다. 과연 그런 환경 속에서 또 부모와 자식 사이는 얼마나 좋을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언급한 친구 역시 그래서 벌써 국민학교 때부터 불량한 형들과 어울려다니며 싸움도 하고 사고도 많이 쳐서 부모와 누나들 속을 많이 썩이고 있었다. 과연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애순의 큰딸 금명은 그렇게 반듯한 모습으로 큰 성공까지 거둘 수 있었을까?
금명이 아마 나와 비슷한 또래일 텐데,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미 중학교 때부터 진로는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시대가 나아졌다고 그때 쯤 되면 중학교 졸업하고 실업계 진학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기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에게 상업고 진학은 또 하나의 기회였다. 당시 은행이나 혹은 중소기업들에서 굳이 여직원들에게 대졸학력까지 바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충 돈계산이나 할 줄 알고 장부만 제대로 알아먹을 수 있게 작성할 줄 알면 되었었다. 당연히 그런 경우 대부분 결혼하면 그만둘 것을 전제로 여성의 젊음만을 대상으로써 소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급여수준도 낮았고 업무환경은 더 형편없었다. 당시 대학생 가운데 여성의 비율을 본다면 금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부모를 너무 잘만난 결과인 셈이다. 일단 은명이 대학 보내자고 금명을 공장에 보내지 않은 것부터 관식과 애순은 당시 상식에서 믿을 수 없는 부모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과연 그 끝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하게 애순이 어려서 같이 자란 관식과 결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아마도 현실의 관식은 애순이 도시에 나가서 일을 하며 돈을 벌다가 만난 주위에서 그나마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나마 아무일없이 그냥 그대로 애순은 애순대로 관식도 관식대로 각자 일하면서 살던대로 살았으면 별 일이 없었겠지만 그러기에는 한국사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었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이들이 너무나 많았었다. 여성은 그나마 싼값에 갈 곳이라도 많았지만 남성은 오히려 나이와 경력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어렸을 적 동네에 대낮에도 술이나 마시며 빈둥대는 아저씨들이 많았던 이유였다. 염병철도 그래서 생계를 책임지던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자 돈을 벌기 위해 그 위험하다는 원양어선에 올라야 했던 것이었다. 그런 경우 알콜중독과 가정폭력은 상수처럼 따라온다. 그리고 아이들은 일찍부터 세상을 알고 어른이 되어 버린다. 안내상이 국민학교 때부터 담배를 폈었다던가? 그런 정도가 아니라니까. 자전거 훔치고 우유 훔치는 방법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것이 벌써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밖에 어릴 적 친구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벌써 고등학교 때부터 알음알음 전해듣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오로지 자기 노력만으로 대학도 나오고 성공도 한다? 금명이라면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대신 부모와의 깊고 굳은 연대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혼자서 죽어라 노력해야 그 근처까지 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당연하게 그 끝은 드라마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현실의 어느 가정이었을 것이다.
일단 드라마에서처럼 피붙이도 아닌 여자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줄 수 있었던 염병철과 같은 어른은 없었을 것이란 점에서 드라마는 처음부터 판타지였던 것이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나가 취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미 내가 아는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백주대낮에 고작 5천원 때문에 길거리에서 아주머니들끼리 아예 옷을 벗어젖히고 머리끄댕이 잡는 모습을 보며 자랐던 내게는 그래서 그다지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 부모 세대의 이야기였으니까. 너무 가까운 시절의 이야기라 현실성부터 따지게 된다. 이런 게 가능했다고? 이런 집이 있었다고? 그래서 동화라고까지 말하는 것일 게다. 이런 집은 매우 드물었다. 아주아주 드물어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아마 금명이 자기네 집 가난하다고 징징거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게 가난한 거냐 되묻곤 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행복하고 화목하다. 상처조차 없다. 사람들이 너무 해맑다. 그래서 아마도 애순과 관식에 대해서도 그 주변의 어른들을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일 터다.
그냥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 감상이다. 더불어 당시 실제 어른들이 보고 듣고 느꼈을 현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현실에는 애순도 관식도 없었다. 최소한 출발지점이 애순과 같았다면 그와 같은 현실은 존재하기 매우 힘들었었다. 내가 실제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껴온 실제의 현실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말한 것처럼 나는 지금도 결혼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게 불과 40년 전이다. 딱 한 세대 조금 전이다. 진짜 기적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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