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뒤늦게 김새론의 죽음과 비루한 개인들의 저열한 정의

까칠부 2025. 3. 18. 18:27

어릴 적 TV에서 방영하던 로봇만화들을 보면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정의를 외치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거의 대부분 그 정의란 것이 지구를 침략하는 악당들을 물리치는 한 가지였음을 알게 된다. 지구를 침략하는 나쁜 놈들이 있으니까 그놈들 때려잡는 게 정의다. 그래서 그 지랄같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로봇만화를 TV에서 방영하도록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에서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도 결국 공산당 때려잡자는 것이었으니까. 오죽하면 당시 만화영화 주제가 가사들도 때려부수니 때려잡니 무찌르니 뭐 그런 단어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아니 나중에는 아예 북한 사투리 쓰는 김일성 비스무리한 놈이 악역으로 등장하는 로봇만화도 극장에 내걸리고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로봇만화 주인공들 대부분이 - 정확히는 거대로봇물이겠지만 어린 시절 감성 그대로 쓰느라 로봇만화라 쓰기로 한다 - 아직 성인도 못된 미성년자들이기는 했다. 당시 작화스타일 때문에 노안인 경우가 많기는 해도 대부분 보면 심지어 중학생, 초등학생인 경우도 있을 정도로 대부분 뭐가 정의인지도 모를 어린 나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무엇이 정의고, 그러므로 정의를 지키고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을 한 회 20분 남짓한 분량 안에서 설명하기란 더 어려웠을 테고. 그러니까 저 새끼가 나쁜 새끼라 그 새끼 때려잡는 게 정의다. 아직 자유가 뭔지, 인권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시대에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그래서 공산당 때려잡는 게 민주주의라는 것이었다. 드라마 '왕초'에서도 그래서 김두한이 김춘삼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민주주의 하자! 공산당 때려잡는 게 민주주의다!

 

역사를 보더라도 내세울 것 없는 비루한 처지에 놓인 인간들이 운이 좋아서 관직을 얻었거나, 혹은 그런 관직을 바라는 경우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짓거리가 바로 남의 헛점과 약점을 들추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잘나서 얼마다 대단한 일을 하려 조정에 나아가 왕의 앞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위하는 방책을 읊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얼마나 못났고 누가 무엇을 못했으며 그래서 어떤 놈이 나쁜 놈이더라만 열심히 떠들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흔히 모함이나 음해라 부르고 그런 짓거리를 저지르는 놈들을 또한 간신이라 부른다. 그만한 행동을 해서 정당하게 비판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결국 그것을 모함이나 음해라 부르는 이유는 그를 목적으로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글자 한자, 심지어 주위의 사람 누구를 가지고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하여 몰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짓거리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김새론이란 연예인에 대해 크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일단 내가 사는 게 바쁘다. 연예인의 사생활따위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매일 분단위로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고, 고양이랑도 놀아주어야 하고, 당연히 출근해서 일도 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애니도 봐야 한다. 이렇게 글도 써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 듣고 가장 어이없었던 것 중 하나가 카페에서 알바한다고 하니까 그게 사실인가 여부를 굳이 들추어 확인하고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우던 놈들이 그리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카페알바 한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거지 굳이 그 의도까지 미리 해석해서 비난할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설사 연예계 복귀를 위한 언플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실제 복귀하고 나서 비판하든 뭐하든 해도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음주운전이라는 게 한 사람의 인생을 부정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범죄인 것도 아니다.

 

음주운전은 살인과 같다. 여기서 같다는 말은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 준한다, 그에 버금간다는 뜻이다. 음주운전만큼이나 중대한 범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음주운전에 대한 법적인 형량은 그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음주운전했다고 징역을 사는 경우도 드물고 하물며 살인죄처럼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존치되어 있는 사회에서도 사형까지 가는 경우는 아예 없다. 실제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심지어 운전면허가 취소된 많은 사람들이 그냥 운전면허 없이 잘만 살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음주운전이 그렇게 심각하게 살인과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중대하게 여겨지는 자체가 그만큼 음주운전이 흔하고 잦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인도 형량이 있다. 법으로 정해진 형량 이상 살인에 대한 죄를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된다. 사람을 죽였다고 그 사람을 다른 누군가가 죽여서는 더더욱 안되는 것이다.

 

음주운전을 했으니까 죽어서도 욕을 먹어야 한다. 음주운전을 했으니까 카페에서 알바도 해서는 안된다. 음주운전을 했으니까 영원히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 오로지 전근대 왕조시대에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경우 정도나 비슷하게 해당될 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잘못했으니까. 누군가가 처음부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러므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옳다. 그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정당하다. 그래서 말한다. 누가 음주운전하라 그랬는가. 그러니까 음주운전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범죄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다. 사기를 쳐서 죽을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도 아니다. 의도적으로 상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래서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으면 그냥 연예인 못하게 하는 것으로 끝냈어야지 카페 알바하는 것까지 의심하고 비난하고 몰아세우는 것은 아예 정상적인 삶 자체를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어떤 명분으로? 하지만 그것은 대중으로서 자신의 권리이며 또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고작 연예인 한 사람 나락으로 보내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은 비루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현실에서 너무나 한심하고 처참한 수준인 자신의 가치를 그나마 남들보다 있어 보이는 존재들을 공격함으로써 끌어올려보고 싶은 것이다. 저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지를. 저들의 불순한 의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내가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가를. 그러므로 내가 돈도 없고 직업도 변변찮고 사는 것도 한심하지만 그래도 저놈들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자신의 비루하고 비참하기까지 한 현실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저들을 공격하는 순간 자신은 지금의 현실을 잊을 수 있다. 그를 정당화할 수 있다. 삼국지에서 예형이 보는 사람마다 욕하고 돌아다닌 이유였다. 그러면 자기가 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한다. 저놈을 비난해도 될 것 같을 때 무제한적인 비난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간다.

 

그래서 그런 경우 흔히 보이는 모습 중 하나가 현실의 인간이 아닌 이상적인 인간을 모델로 제시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완전하고 무결한 인간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그 잘못들을 과장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역시 역사에서 간신들이 흔히 쓰던 수작들이다. 자기도 지키지 못할 도덕적인 완결성을 전제로 절대 공격받지 않을 위치를 선점한 채로 끝나지 않을 공격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상적인 모델을 통해서 또한 순수한 의도라는 것도 강제된다. 가장 순수한 의도를 전제하여 그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을 불순하다 가정한다. 과거 타블로나 적우 등의 연예인들을 인터넷에서 집단으로 공격할 때도 흔히 쓰였던 방법이다. 가장 이상적인 어떠한 모델을 가정하고, 가장 순수한 의도를 전제한 뒤 그로부터 벗어난 사소한 모든 것들을 빌미로 삼는다. 제한은 없다. 그래서 형량도 없다. 무제한적인 영원한 공격의 끝은 따라서 당사자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주로 젊은 여성들이 그 대상이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아무래도 성인 남성들은 당연하게 세상의 때가 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니까. 순수해야 하고 순결해야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상화된 대상으로써 타인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럼으로써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인 완결성을 이룰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서 매순간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터다. 그러니까 남이 카페에서 알바하든 뭐하든 그래서 방송에 나와서 얼굴을 비췄는데 음주운전을 한 전과에 비해 자숙기간이나 그동안 치른 댓가가 충분했는가에 불만족스럽다 여기는 경우가 아닌 한 그다지 신경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 자신을 위해 써야 하는 시간조차 분초가 아쉬울 정도다. 그렇지 못하니까. 그렇게라도 비루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한심한 주제들이 그래서 더욱 소중한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는 것으로 자기를 위로하려 하는 것인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 대상은 자기보다 그나마 만만하다 여기는 이들인 것이고. 그래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는가.

 

연예인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댓가를 치른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동안 자신이 꿈꿔왔고 노력해왔던 미래가 사라지고 전혀 다른 현실과 마주하게 된 자체가 이미 그로 인핸 댓가인 것이다. 그럼에도 살고자 한다. 그런데 굳이 거기에 대해서까지 단죄하려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 것인가. 어떤 의도에서 그러는 것일 것인가. 그것이 진정 정의일까? 사회적 정의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해서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일까? 이제는 대상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내가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남의 사생활 문제는 어지간하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동인 내가 인터넷에서 글을 쓰면서 지켜온 한 가지 기준이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다. 알 수 잇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안다고 자처한다.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비루하고 저열하며 악랄하고 한심한가.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 김우중이 참 좋은 말을 남겼다. 그대로다.